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우환 작가

o미술 세상

by 송강 작가 2021. 11. 15. 19:33

본문













이우환 작가

한국 대표 추상화가 이우환(85)의 작품이 국내 생존 작가 중 처음으로 경매가 30억 원을 넘겼다. 미술품 경매사 서울옥션은 25일 “전날 열린 경매에서 이우환의 그림 ‘동풍(East winds·사진)’(1984년)이 31억 원에 낙찰됐다”고 밝혔다. 이는 올해 6월 경매시장에서 팔린 그의 다른 연작 ‘점으로부터(From Point)’(1975년)의 기존 최고 낙찰가(22억 원)를 자체 경신한 것이다.



앞서 이우환의 작품들은 주로 20억 원대에 거래됐다. 2012년 홍콩 경매시장에서 ‘점으로부터’(1977년)가 약 21억 원에 팔린 데 이어 2014년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선으로부터’(1976년)가 23억 원에 거래됐다. 이번에 낙찰된 ‘동풍’도 2019년 10월 홍콩 경매시장에서 약 20억 원에 팔렸다. 2년도 안 돼 그림 값이 10억 원가량 오른 것이다.



‘동풍’은 자유로운 운율과 역동적 리듬을 보여주는 이우환의 연작 ‘Winds’ 시리즈 대표작으로 꼽힌다. 2019년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부산시립미술관의 이우환 작품 전시를 방문해 ‘Winds’ 시리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 대중에게도 알려졌다. 이우환은 지난해 추상화가 김환기(1913∼1974)를 제치고 작가별 낙찰 총액 1위(약 149억7000만 원)에 올랐다.



?이우환(1936~)



1936년 6월 24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222번지 평광마을 구식골에서 아버지 이인섭(李仁燮)[4]과 어머니 여주 이씨 이위효(李渭孝)[5]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면 소재지인 덕대리 272-5번지[6]로 이주하여 살면서 군북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부산으로 넘어가서 경남중학교를 졸업했고, 또 다시 상경하여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했다. 그는 당초 문학을 전공할 작정이었으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는 지원할 성적이 안 되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 했는데, "미대에 가서도 문학 하는 친구가 꽤 있다"는 담임교사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1956년 입학한지 반년이 채 안 되었던 그해 여름, 21세의 이우환은 밀항해서 일본으로 건너간다. 당시 일본과는 적성국으로 미수교상태였기에 일본을 가기 위한 수단은 밀항이었다. 이우환 본인의 말로는 숙부 이인갑(李仁甲)의 병문안 차 일본으로 갔다가 그대로 일본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니던 서울대학교를 중퇴한 뒤, 니혼대학 철학과에 편입했다. 그는 1961년에 니혼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나 고민 끝에 철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일본화(日本畵) 학원을 다니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일본에서 작가로 인정받기란 쉽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매일신문》의 <현대일본미술전>과 쉘 주최 <현대일본미술전>에 몇 차례로 응모하지만 낙선한다.



한편 이 시기 한국에는, 일본의 모노파보다 8년 앞선 1962년에 물질에 대한 실험을 전개했던 곽인식이 있었다. 곽인식은 이미 1963년도에 유리, 황동, 철이나 점토, 종이 등 각 물질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이를 작품화하고 이후 한국 후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었다. 곽인식은 일찍이 이우환을 알아봤는데, 이우환은 이러한 곽인식의 추천으로 1968년 한일 문화교류 일환으로 열린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한국현대회화전>에 참여한다. 또한 1969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였던 김세중 역시 이우환을 알아본 인물 중 한 명. 김세중은 비엔날레 한국대표로 곽인식과 함께 이우환을 선정했다.



이듬해 1969년은 이우환에게 중요한 한 해였다. 이우환은 당시 일본 미술계에 ‘핫’한 비평 <존재와 무를 넘어서-세키네 노부오론>, <다카마쓰 지로-표현작업으로부터 만남의 세계로>을 써서 일본미술계에 입지를 굳혔다. 이 평론은 일본미술운동인 모노파(物派)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모노파가 일본에서 유행할수록 평론가 이우환의 이름 역시 덩달아 높아져갔다.



이를 다시 말하면, 이우환이 그전부터 급진적인 작업을 이미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미술계에서는 작품보다 평론으로 주목받았다는 말이다. 1971년 이우환은 일본에서 평론집 <만남을 찾아서>를 출판한다. 당시 이우환의 평론은 철학과 출신답게 하이데거와 메를로 퐁티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의 이론을 미술에 접목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하이데거의 예술개념과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신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성 개념을 ‘모노파’에 접목시켰다. 이렇게 1960년대 말부터 1970년 중반까지 40여 편이 넘는 평론을 발표하였고, 이우환의 평론과 함께 모노파 운동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까지 선풍적으로 유행하였다. 어느 정도 일본미술계에서 이름을 얻었다고 생각한 이우환은, 이후 미술비평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1970년 구겐하임 미술관 사건과 1971년 파리비엔날레 사건이 그 단적인 예다. 구겐하임미술관은 <재팬, 아트, 페스티벌>에 이우환을 선발했지만, 일본 측은 이우환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시 초대를 거절했다. 그리고 《르몽드》를 위시해 적잖은 파리 언론매체에서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이우환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결국 그는 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그는 일본작가 신분으로 출품할 수 없겠냐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3년 이우환은 일본 타마미술대학 교수로 임명되고 이를 계기로 당시 일본 메이저 갤러리 중의 하나인 '도쿄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후 1974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열린 <일본현대미술전>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데, 1970년 구겐하임미술관에 출품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당시 이우환은 메이져 갤러리(화랑)의 파워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는 뒤셀도르프 미술관 그룹전을 계기로 사방팔방으로 독일 메이저 갤러리들을 물색하여 1976년 유럽 메이저 갤러리 중의 하나인 독일 보쿰 '갤러리m'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윽고, 1978년에는 불과 4년전 그룹전으로 참여했던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당당하게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프랑스 에꼴 데 보자르의 객원교수 및 초빙교수를 지냈고, 2000년 유네스코 미술상, 2007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2011년에는 마침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자신만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2014년에는 베르사유궁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했다. 2013년에는 대한민국의 문화, 예술발전에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1. 작품세계[편집]

이우환이 미술계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일본 미술계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모노파[7] 운동이었는데, 이우환은 1969년 모노파의 대표적인 작가 세키네 노부오를 다룬 평론인 '존재와 무를 넘어서'를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후 모노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서 큰 영향을 끼쳤다. 1971년에는 평론집 '만남을 찾아서'를 출간해 한국 미술계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다만 철학과 출신답게 미술평론에 하이데거의 이론을 접목하는 등(...) 가볍게 읽기는 어려운 글을 많이 썼다.



하지만 외국인 작가로서 자국 미술계에서 큰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던 이우환에 대한 일본 작가들의 시각은 곱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모노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역시 적지 않았지만 1970년대까지 모노파는 일본 미술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external/www.gal...

<점으로부터>(1975)

external/www.gal...

<선으로부터>(1978)[8]

그림으로는 초기엔 <점으로부터> 또는 <점에서> 등의 제목을 붙인 점 연작을 그리다가 1970년대부터는 선을 사용한 선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표현에 있어서 감정의 표출을 상당히 절제하고, 일정한 패턴이나 질서를 유지하면서 리듬감을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external/www.pla...

조각작품인 <관계항>(1978)

같은 시기 조각 작업도 병행해 <관계항> 시리즈를 제작하여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초기에는 솜, 철골, 유리, 노끈, 목재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으나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들이 바로 돌과 철판이다. 이 두 소재는 형태와 만들어진 과정에 있어서도 만들어진 것과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대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철판이라는 것이 돌로부터 성분을 뽑아내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닮았지만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두 소재를 서로 만나게 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의미를 찾고 있다. [9]

external/da-arts...

<바람과 함께>(1987)

하지만 1980년대에 와서는 자신의 이러한 작업에 대해 내적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혼란은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앞서의 정연한 스타일이 깨지는 양상을 띠고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 그린 것 같은 화풍까지는 또 아니라는 것이 중평.

<조응> 시리즈

external/www.gal...

(1994)

external/www.gal...

(2003)

external/www.gal...

(2011)



1990년대에 이르러서 이우환의 화풍은 다시 안정으로 돌아온다. 이전까지 여러 개의 점이나 선이 등장하던 것과는 달리 캔버스에 점이 한 개나 두 개만 찍힌 아주 간단한 구조로 변화했다. 그렇다 보니 작품을 접한 일반 사람들은 저런 건 나도 그리겠다는 소리를 하기가 일쑤지만, 이런 그림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당연히 그리 쉽지는 않다.



우선 작품 제작에 사용되는 캔버스, 물감, 붓이 모두 특수 제작된다. 캔버스는 두께가 보다 두껍고 미리 흰색으로 네 번에서 다섯 번 정도 칠해져 있다고 한다. 물감은 구입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돌을 공수해 와 갈아서 사용하고, 붓 역시 표현하기 알맞게 크기를 맞춰서 제작한 것이다.



다음으로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뒤 점과 비슷한 크기의 종이를 꺼내 이리저리 놓아보며 그릴 위치를 정한다. 점 한두 개만으로 작품 전체를 표현해야 하다 보니 전체 작업에 있어서 점의 위치 선정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기 때문에 고민을 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위치를 잡았으면 물감을 찍은 붓으로 점을 찍는데, 이때 캔버스를 뉘어놓고 작업을 하므로 허리를 구부린 채로 점을 그려야 한다. 자세가 상당히 힘들지만 캔버스를 세워놓고 그리는 것보다는 더 잘 그릴 수 있다고 한다. 호흡 역시 한 번 숨을 잘못 쉬어서 삐끗하면 점의 형태가 완전히 망가지기 때문에 숨을 내쉬면서 하거나 아예 숨을 참고 그어야 한다. 이 과정을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마르면 다시 그리기를 반복해야 작품이 완성되어 최종적으로 점 하나를 그리는 데 두어 달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위조작가들이 가장 쉽게 위조하는 작품으로 이우환 작품이 손꼽힌다. 심지어 위조 당한 본인 이우환 자신도 자신의 위조품을 보고 '호흡'이 똑같다며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 자세한 것은 아래 참조.

3. 작품 사상[편집]

커다란 방에 큰 캔버스가 걸려있고 캔버스에 점이 하나나 둘 휑그렁하니 찍혀있어요. 그러면은 거기 들어가서 좋게 보는 어떤 분들은 무언가 느낌이 좋다든지, 긴장감이 돈다든지, 그 분위기에 뭐랄까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든지, 그렇게 좋게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전람회라고 갔는데 가보니까 텅 빈 캔버스에 점 하나만 뎅그러니 찍어놓고, 볼거리가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뭐야? 점 하나 찍어놓고 뭘 보라는 거야? 웃기네?" 그러고는 그냥 히죽이 웃고 가버리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면 그건 틀린 것인가. 그건 어느 쪽이 맞다고도 틀렸다고도 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사실은 작가는 거기 들어가서 뭘 본다기보다도 가능한 대로 어떤 느낌을 주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보통은 미술작품을 보러 간 분들이 대상물을 보러 가는 그런 습관이, 그리고 그런 교육이 오랫동안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전람회에 가서 그 대상이 뭔가, 뭐가 그려져 있는가, 그걸 보는 입장에 서면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게 없어요. 뻔하다,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10]

이우환의 작품세계에서 주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관계다. 작품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단순한 것들이지만 그와 함께 여백이 있는 전체 공간을 조망하면서 작품과 작품 바깥의 주변을 새롭게 인식하고 느끼게 하는 등의 효과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주로 내세우는 개념은 조응(correspondence)이다.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모습을 통해 '조응하는 관계'를 표현한다는 것. 쉽게 등식에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이 대응하는 식이다.



예술 작업 - 은유 대상

사물 : 사물 ≒ 인간 : 인간

사물 : 사물 ≒ 사물 : 인간

사물 : 사물 ≒ 인간 : 세계



이우환의 작업을 보면 철판과 돌을 쌍으로 놓아둔다든지, 큰 붓으로 물감을 묻혀서 화폭에 찍는다든지, 붓에 물감을 묻혀 물감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선을 긋는 작업을 반복한다든지 하는 작업이 많다. 철판 : 돌이나 물감 : 화폭의 관계에 서로 만나는 관계를 대응시키고, 이를 현상학적으로 해석하라고 던져 주는 식인 것이다. 적어도 작가 이우환 본인은 작품이 이론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여기고 작품을 만든 것이다. 사실 미술 작품은 자신이 느낀 바에 따라 감상하면 그만이다. 다만 이우환이 미술이론가로 활동하며 작품에 그런 이론을 담았고, 그 이론에 비해 작품이 외형적으로 상당히 단순하게 생겼기 때문에 대중은 그를 어려운 작가라고 인식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이우환의 작업에서 관계가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 것은 아무래도 오랜 이방인 생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우환은 시골에서 서울로, 그 다음에는 일본으로, 또 미국과 유럽 등지로 계속 이동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도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는 중간자로서의 역할에 보다 관심을 두어 왔다고 본 것이다.

4. 반응[편집]

이우환의 작품은 인터넷 상에서는 별로 좋은 평가를 못 받는 편이다. 흔히 이런 그림이 홍콩 경매에서 21억 원에 낙찰됐다는 등 경매 가격과 함께 언급되면서 저런 그림이 저만한 값을 받을 만큼 잘 그린 거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때문에 주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현대미술 까는 글이 올라올 때마다 높은 확률로 이 작가의 그림을 짤방으로 넣는다. 작가에게는 이런 그림을 팔아서 수십억을 버느냐는 비판이 쏟아지고, 그림을 산 갑부에게는 왜 이런 그림을 수십억 원에 사느냐고 뭐라 한다.



하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일이다. 사실 순수미술계에 한정해서 보면 추상화는 비주류가 아니다. 이전 세대인 김환기나 유영국, 남관, 김영주 등이나 비슷한 연배인 박서보, 김창열, 정창섭, 윤형근, 하종현, 윤명로, 이승조 등 추상화를 그린 작가들이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자기 작품을 수십억에 사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작품 활동을 했을 뿐인데 이상한 그림을 그려서 비싼 돈을 받아 챙긴다고 욕을 먹는다. 하지만 위작을 보고도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면 억울해도 할 말 없을 듯.



하지만 대중적인 상업예술까지 아울러 보면 일반인들 입장에선 여전히 추상화가 낯선 것이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상업예술과 비교해 추상미술에 희소성이 있다는 점이 작품 가격을 높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우환의 작품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것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는 굉장히 많지만, 이런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그림은 사진 나온 이후로 사실상 희소성이 나락으로 떨어진 터라.[11] 돈 많은 사람들이 비싼 값에 그의 작품을 사는 것 역시 이런 점과 맥락이 닿는다. 자산으로서의 가치도 있으면서 특히 이름난 기업의 경우 이미지를 좋아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도 있을 테니..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술계의 인정을 전제로 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이우환의 작품은 적어도 평단에서는 작품성 면에서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로 잘 그린 것처럼 안 보인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그림은 미술계에서도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민중미술 계열 작가들이나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신세대 작가들은 이런 작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원로작가 김구림의 경우처럼 대놓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관계'나 '만남' 또는 '공간'에 대한 고찰을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대표작 몇 개만 만들어내면 되는 것인데, 매년 수십개의 똑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돈 벌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 개념예술은 한 두작품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한 두 작품을 넘어서서, 동일 개념을 공유하는 작품을 수십에서 수백개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의 자기복제나 다름없다는 것.



하지만 단순히 회화로서만 살펴보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특유의 매력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그림 역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럼에도 이런 그림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그 작품이 자기 스타일과는 안 맞는 것 뿐이다. [12][13][14]

5. 위작[편집]

결론은 하나도 이상한 걸 발견하지 못했다. 전부 진품이다. 호흡이나 리듬이나 채색을 쓰는 방법이나 다 내 것.

2016년 13점의 위작이 드러나서 판매상과 위조범이 잡히자, 진품인지 확인하는 경찰서 출석에서, 그 위작은 자신의 작품이라고 인터뷰하면서... 반면 법원은 이우환 작가가 쓴 적 없는 유리가루를 사용한 점, 캔버스 제작 연도, 어색한 서명을 들어 위작이라고 판단했다.

"작가는 '맞다'하고 나는 아니라고 하고... 내가 죽일 놈이야.. 죽일 놈인 건 아는데.. 그거는 캔버스 자체가 다르잖아요. 우리 거는..."

KBS 시사기획 창에서, 위작 조직 총책임자와의 인터뷰. 이우환 작가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70년대 후반 작품의 캔버스'와 '자신이 위작한 캔버스'는 제작 연도에 따른 캔버스 재질이 다르다면서...

다만 이우환 작가의 커리어에 타격을 주는 것이 있다면, 위작 문제다. 보시다시피 간단한 그림이기 때문에 위작을 시도하려는 조직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작 문제가 불거졌을 때, 위작이라고 밝혀진 그림을 이우환 스스로가 '호흡과 리듬이 내 것'이라면서 '위작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근데 이 위작들은 캔버스 제작년도가 작품의 제작년도와 다르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져 있는 상태였다. 즉, 자신의 작품이 아닌 것을 보고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한 것.



그가 자신의 그림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평소에 이우환이 그림 그릴 때 자신만의 '호흡과 리듬'을 가지기 때문에 똑같이 베낄 수 없으며, 그렇기에 하나를 그리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거짓으로 드러난 셈. 이쯤되면 작가의 그림 철학마저 의심되는 수준이다. 그냥 아무 힘들이지 않고 점하나 찍어놓고는 거기에다 철학적인 설명을 붙여 놓았다고 생각한다면, 위작의 점에도 똑같이 철학적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며, 만약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그 원작만의 '아우라'가 있는 것이라면, 작가 스스로가 위작을 자기 작품이라고 말하는데 이르러서는, 이우환 작가 역시 위작에서 '아우라'를 느끼는데 다른 사람들도 위작에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결정적인 비판을 도저히 해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원작에는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이 있어 '아우라'가 생기기 때문에 가치가 생긴다고 보았다.[15] 이는 원작의 가치를 설명할 때에 항상 나오는 이야기이며, 복제품 보다 높은 '원작의 가격'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미술계 내에서는 매우 중요하고도 유명한 이론이다. 따라서 위의 경우처럼 그림을 그린 당사자인 이우환 작가 마저 위작에서 원작의 '아우라(호흡과 리듬)'를 느낄 수 있다면, 굳이 원작을 살 필요가 없으며 작품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심지어 베끼기도 쉬우니...





자세한 경과는 이렇다. 2016년 들어 이우환의 위작 그림이 1억 8600만 원에 홍콩 경매에서 팔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같은 해 2월 18일 최명윤 국제미술과학연구소장은 경찰이 압수한 이우환의 작품 12점에 대해 과학감정, 안목감정을 실시한 결과 모두 위작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우환 측은 위작과 관련해 할 말이 없다고 했으나 #, 결국 변호사를 선임하고 관련 문제에 대해 법적 대응을 했다. 이로 인해 이우환 위작 관련 논란은 장기화가 불가피해졌다. 법정에서 판가름이 나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법원이 위작이다.아니다 판단을 내려도 미술시장에는 해당 작품이 거래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복잡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결국 과학 감정 결과 13작품이 위작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우환 측은 위작이 아니라고 맞서고 있다. 문제는 카탈로그 레조네가 부실하다는 것. 이우환에 따르면 1978~1979년에 그린 작품 수가 2천여 점도 넘고 그 작품이 모두 도록에 기록으로 남은 게 아니라고 한다.#


'o미술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미니크 페로  (0) 2021.11.15
누이 블랑쉐 /백야  (0) 2021.11.15
일상의 미술과 대중문화/강사 김두한  (0) 2021.11.15
히에로니무스 보스  (0) 2021.11.12
이불  (0) 2021.11.12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