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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미술과 대중문화/강사 김두한

o미술 세상

by 송강 작가 2021. 11. 15.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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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슨트 강좌
2021 11 15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3XX25200028


팝아트가 남긴 것들

1950년대 말에 시작하여 6, 70년대를 구가했던 팝아트는 추상미술로 대변되는 현대미술의 철학적 태도에 대항하며, 현실에 대한 순발력 있고 매우 즉물적인 사실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의 일상과 그 일상을 이루는 잡다한 시각 기호들을 그림의 주제와 내용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현대미술이 갖고 있던 한계를 극복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팝아트는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발전했으나,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영국의 팝아트 예술가들과 달리 미국의 팝아트 예술가들은 형식에 대한 혁신적인 실험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팝아트의 본질을 잊어버렸다. 미국의 팝아트는 자신이 상품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그 점을 교묘히 은폐했다. 미국의 팝아트는 상품에 가까운 내용을 구사하면서도 예술작품이라는 관념적인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전을 구축하였다. 물론 이 신전은 부자들에게만 문이 열려져 있다



고급한 미술은 그 내용도 교양을 지닌 소비층의 미각에 알맞은 것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철학적인 해석이나 사유가 필요한 현대의 추상회화들은 고학력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는 호소력이 없다. 그래서 모더니즘 미술은 원래 그것이 출발했을 때에 지녔던 유토피아적이고 전(全) 민중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미술작품에 상응하는 환경, 즉 현대적으로 지어진 미술관에 걸리고, 그곳을 찾는 교양 있는 자산가들에 의해 전시되고 팔리며, 그들이 소유한 집의 넓은 벽에 걸린다. 사실 잘 살펴보면, 현대의 미니멀 아트(Minimal Art)나 개념미술(Concept Art) 작품들은 대부분 현대식 건축물 내부에 걸려 있다. 그 크기나 형태마저도 그런 용도를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팝아트(Pop Art)라 불리는 현대적인 미술 사조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것들에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팝아트가 그려 내고 있는 것은 교양과 자본을 소유한 상류층에게는 너무 속물적이며 일상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코카콜라나 캠벨수프 캔 그리고 연예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들의 모습은 상류층만 향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매우 대중적인 소재들이며, 나아가 대중적인 소비경제를 전제로 존재한다.

대중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을 현대미술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역사는 한참이나 위로 올라간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속화나 정물화는 대중적인 의식을 배경으로 태어난 것들이다. 그림 속 과일이나 사람들의 일상은 역사화나 초상화 등에 비교하여 '의미'있는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려 냈던 도시 풍경이나 사람들이 모인 술집, 세잔이 그린 정물화 같은 것도 비슷하게 설명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의 미술과 다르게 팝아트 예술가들은 현대적인 특수한 상황에서 대중의 일상과 사회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팝아트 예술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변화된 일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고, 특히 미국에서 유입된 새로운 생활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반응을 그렸다. 이들의 의도는 1956년에 런던의 화이트 채플 갤러리에서 열렸던 전시 'This is Tomorrow(이것이 미래다)'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 전시는 총 열두 개의 테마로 나뉘어 열렸는데, 회화와 조각, 건축을 아우르는 다양한 미술 형식들이 동원되었다. 여기서 해밀턴은 존 맥해일(John McHale) 그리고 건축가였던 존 벌커(John Voelcker)와 함께 특별한 환경을 구성하였다. 이 공간에 해밀턴은 인기 있는 대중매체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약간은 혼잡한 전망대를 만들었다. 공간 외벽에는 젊은 여성을 안은 로봇이나 마릴린 먼로의 사진들을 전시하였다. 한마디로 첨단의 이미지로 요지경을 만들어 놓았는데, 해밀턴은 자신의 전시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의미로 가득 찬 상징들의 정의가 아니라 우리의 지각 능력의 발전이다. 시각적인 물질이 계속 증가되는 것을 우리가 수용하고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이들 작품의 특징을 대략 정리해 보면, 자본과 기술의 발달로 나타난 그리고 미래에 야기될 현상을 보여 주고 있는데, 해밀턴의 작업처럼 싸구려 잡지에서 오려 낸 이미지들을 콜라주라는 형식으로 묶어서 소비 지향적 현대 생활을 보여 주거나 로봇과 같은 존재가 등장하는 미래 사회를 보여 주었다. 이 모든 형상은 무에서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여러 가지 매체에 나타난 동시대의 이미지들을 엮어 놓은 것으로, 다양한 시각적 이미지들을 미술에 수용하고 활용할 눈과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해밀턴이 동료였던 피터와 앨리슨 스미스(Peter & Alison Smith) 부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팝아트의 성격을 조목조목 잘 알 수 있다. 자신들의 예술은 "대중적(즉 익명의 다수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처럼)이고, 유통기간이 길지 않으며(즉 순식간에 소비되어야 하고), 빨리 잊히는 것이어야 하고, 값싸고 다량으로 생산되며, 젊고(즉 젊은 소비층을 위한 것이고) 웃기며 섹시하고 조잡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미술이나 고급문화가 구축했던 모든 기존의 원리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값싸고 도회적인 사물들을 그려 내는 배경에는 20세기 중반부터 세계적으로 확대된 미국식 소비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팝아트는 그런 소비문화의 특징을 담아낸 예술이다. 팝아트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눈을 돌렸다. 추상미술이나 초현실주의 미술이 인간 내면의 심리와 심오한 철학적 원리를 탐구했던 것과는 달리, 팝아트 예술가들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비재에서 그들의 미학을 발견했다. 대중매체와 소비사회에서 넘쳐나는 광고나 상품의 포장이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었다. 그런 환경이 만들어 낸, 어떻게 보면 키치(Kitsch)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그 이미지를 복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사실 '키치'는 원작을 조악하게 모방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팝아트는 그런 유치한 모방을 한 번 더 모방함으로써 전통적인 모방이론에 반항한 것이었다.

영국의 팝아트는 시대와 환경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이었다. 그러나 조금 늦게 시작되었지만 더 영향력 있는 사조로 발전한 미국의 팝아트는 그 성격이 달랐다. 이제 미국의 대표적인 팝아트 예술가들을 만나 보자.


르네 마그리트는 그의 파이프 그림들을 이용하여 모사된 사물과 모사한 그림 사이의 차이를 가르쳐준다. 그림은 현실 자체가 아니며 항상 현실을 가리키고 현실을 의미할 뿐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는 그림을 사물로 여기는 편견에 젖어 있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며, 언어와 그림이 각자 고유한 법칙에 따라 현실을 어떻게 지시하여 재현하는지 숙고하게 만든다. 다음 글에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미셸 푸코는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들의 다의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미지의 배반>을 보고 문장 위에 쓰인 선들의 앙상블이 파이프라고 정색을 하고 주장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려진 파이프가 파이프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묻고 대답하는 버릇이 들어있다. 이 그림은 무엇인가? 그것은 송아지이다. 그것은 정사각형이다. 그것은 꽃이다. 이러한 오래된 습관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처럼 도식화되고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의 기능은, 묘사 한 사물을 한눈에 척 알아 보도록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종이나 화판에 약간의 연필이나 분필을 묻힌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하는 파이프를 화살표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듯이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이 파이프 인 것이다.



우리가 당황하는 까닭은, 한편으로 (이것이라는 지시 대명사, 파이프라는 말의 의미, 그림의 유사성 때문에) 글을 그림과 관련시키는 일이 불가피한 데, 다른 한편으로 이 문장이 진실이거나 허위이거나 모순임을 밝힐 수있는 관점을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두 가지 신비>에서도 동일한 파이프, 동일한 말, 동일한 문자를 볼 수있다. 하지만 글과 그림은 경계도 용도도 알 수없는 임의의 공간에 위아래로 배치되어 있지 않다. 마루청이 잘 보이는 바닥에 이젤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 얹어 놓은 액자 안에 글과 그림이 들어가있다. 파이프 한 개는 공중에 떠있다. 이는 화판에 묘사 된 파이프와 똑같이 생겼지 만 훨씬 더 크다.

<이미지의 배반>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하기 때문에 우리를 당황시킨다. <두 가지 신비>는 모호성을 의도적으로 증폭시킨다.

(...)

<두 가지 신비>에는 두 개의 파이프가있다. 아니면 동일한 파이프를 그린 두 그림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한 파이프와 이를 그린 그림이라고해야 할까? 아니면 두 파이 프를 그린 두 그림이라고해야 할까? 아니면 두 그림인데 그중 하나만이 파이프를 그린 것이라고해야 할까? 아니면 두 그림인데 둘 다 파이프도 아니고 파이프를 그린 것도 아 니라고해야 할까? 아니면 한 그림인데, 이는 파이프를 그린 게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다른 그림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캔버스에 쓰인 문장이 무엇에 관해 말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해야 할까?



미셸 푸코 (1973)



*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들은 일종의 그림에 관한 그림, 메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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