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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o예술가의 삶과 작품

by 송강 작가 2020. 12. 2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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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이 그린 〈커다란 소나무와 생트 빅투아르 산〉을 감상한 라이너 릴케는 “어느 누가 이토록 웅장한 눈으로 산을 보았는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모네가 찰나의 미학을 잡아낸 화가였다면
세잔은 지속의 미를 그러낸 화가였다.
그가 그린 프로방스를 둘러싸고 있던 생트 〈커다란 소나무와 생트 빅투아르 산〉에는 중앙의 다리와 농토, 작은 농가를 기하학적으로 배치해 그림의 깊이감과 거리감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원근법과 데생이 회화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수많은 화가가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절대 진리로 여겨지던 전통은 폴 세잔에 의해 새로워진다. 붓 터치와 색채의 조합만으로 전통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기존 원근법 대신 온화한 색을 앞쪽에 차가운 색을 뒤쪽에 배치하거나 앞마을보다 뒷산을 더 크게 그리는 방식으로 새로운 원근감을 나타냈다.

혁신적인 방식은 당대의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다 보니 그의 그림은 일반인들보다도 당대의 예술가들이 먼저 찾았다. 클로드 모네, 폴 고갱, 카미유 피사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유명한 화가들이 세잔의 그림을 두세 장에서 많게는 수집 장씩 소유하고 있었다. 화가가 화가의 그림을 인정한 것이다. 그들은 세잔을 그림을 공부하고 그의 독창적인 화풍을 연구했다. 그래서 그를 ‘화가들의 화가’라 부른다.

폴 세잔처럼 명성과 존경을 함께 받는 예술가는 드물었다. 한 시대의 존경은 그 시대적 윤리와 가치에 충실할 때 받는다. 조직과 인습이 강한 사회는 작가의 작품보다는 태도와 형식을 더 중시한다. 하지만 유명 예술가들일수록 초시대적인 욕구를 그대로 표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명성만큼 존경받지 못한다.

세잔은 동료 예술가들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받기보다 다른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단절적 역발상으로 예술의 미래를 신탁하던 선각자였다. 그런 세잔이었지만, 그를 일순간 바보로 만든 여인이 있었다.

사랑 앞에 바보가 된 세잔
외골수로 살았던 화가 폴 세잔은 그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성적이어서 친구도 적었으며 누구의 후원도 없이 오직 홀로 고독과 침묵에 쌓여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에도 그랬다. 그를 위로하는 것은 그림뿐이었다. 이런 세잔에게 따듯한 사랑의 온기(溫氣)를 준 여인이 오르탕스 피케(Hortense Fiquet, 1850~1922)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세잔의 아버지에게 절대 비밀로 해야만 했다. 이런 비밀스런 삶은 세잔이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모자 판매상이던 아버지가 가게 점원 엘리자베스 오베르(Elisabeth Aubert)를 좋아해 세잔을 가져 세상의 눈을 피해 낳아야 했다. 세잔이 다섯 살 될 무렵에야 부모가 정식 결혼을 해 비로소 세잔도 아버지를 공적으로 부를 수 있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난 아버지는 이때부터 은행을 인수하며 대 실업가가 되었다. 아버지는 자기 일을 아들이 이어받길 원했다. 그래서 세잔을 프로방스의 법대에 진학하도록 했다. 하지만 호화로운 삶에만 관심이 있던 세잔에게 법대는 적성에 맞질 않았다. 오히려 그림이 그를 매료시키고 있었다. 힘들게 학업을 이어가던 세잔은 1861년 어머니를 동원해 아버지의 설득을 얻은 뒤 법대를 중퇴했다. 그때부터 파리 국립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살롱작품전에 그림을 출품하면서 화가로 성공할 꿈을 꾼다.

하지만 대학은 번번이 낙방했고, 출품한 그림들도 수차례 낙선한다. 이때의 콤플렉스가 평생 세잔의 응어리로 남는다. 1863년 살롱전에서 떨어진 화가를 중심으로 연 ‘낙선전’에 마네 등과 함께 작품을 전시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미술계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재능 없는 아들이 헛수고하고 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은행 일을 하라고 압박을 가하지만 세잔은 굴하지 않는다.

당시 미술계를 술렁이게 만드는 모델이 등장한다. 사설 미술학교에서 책 판매원을 하면서 부업으로 화가 지망생들의 모델 일을 하고 있던 오르탕스 피케였다. 알프스 산악 지역 출신으로 열아홉 살 때 무작정 파리로 상경한 오르탕스는 산골 소녀의 순박함을 지녔음에도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에서 나오는 신비로움을 함께 지녀 많은 화가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세잔은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모델이 되어 앞에 서 있었음에도 세잔은 그녀를 그릴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났지만 그림은 엉망이 되었다. 결국 며칠을 더 모델로 세웠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잔은 계속해서 오르탕스를 모델로 세웠고, 그림은 그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감상만 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세잔은 오르탕스를 모델이 아닌 연인으로 만들어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화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오르탕스였다. 그녀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그가 오르탕스를 애인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애인을 만들 묘안을 찾던 중, 가난한 그녀의 삶에 주목했다. 산골에 있는 본가가 가난했기에 오르탕스는 두 가지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본가로 보내고 있었다. 대부분의 화가가 가난했기에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납치
세잔은 자신이 대은행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용해서 오르탕스를 유혹했다. 본가를 돕는 일에 지쳐있던 오르탕스에게 어머니와 누이의 도움으로 여유롭게 작품 활동을 하는 자신을 내세웠다. 세잔의 집안 배경을 보고 오르탕스는 구애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면서 어둡고 우울한 색조였던 세잔의 그림은 큰 변화를 보인다. 한 시점에서만 안정적으로 그리던 그림은 동거 이후 다각도로 관찰해서 한 화면에 담아내는 화풍으로 변화 발전했다.

동상이몽의 사랑
두 사람의 동거는 서로에게 다른 의미였다. 세잔은 아버지에게 철저히 비밀로 해야 했다. 만일 알려지면 당장 생활비가 끊기는 것은 물론 의절까지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오르탕스는 동거 이후 삶이 달라질 거라 여겼다. 부잣집 아들과 살게 되었으니 파리의 번화가에서 화려하게 사는 것은 물론 산골 본가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아버지 몰래 도와주는 어머니의 돈은 생계 걱정만을 해결해줄 뿐이었다.


아버지는 임종을 앞둔 1886년에서야 결혼을 승낙했다. 동거 17년 만이었고 손자는 벌써 열네 살이 되어 있었다.

결혼은 세잔이 아들을 아버지의 유산상속자로 배려하기 위한 형식에 불과했다. 형식적인 부부사이지만 오르탕스는 세잔의 그림을 소중히 관리했다. 그림 한 장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공과 시간을 들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휴지통에 버리는 세잔이었다. 그런 그림들을 오르탕스는 알뜰히 챙겨 두었다. 훗날 이 그림 중에 명화가 된 작품이 많았다.

세잔은 처음 연애 시기를 제외하고 오랫동안 오르탕스를 모델로만 대했다. 두 사람의 소통 부재는 그림에서도 오롯이 나타난다. 세잔의 작품 속에서 오르탕스는 대부분 무표정했다.

별거 이후 또 하나의 우정, 에밀 졸라

결혼 6개월 후 아버지는 숨을 거둔다. 아버지의 부재는 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는다. 세잔은 어머니와 함께 파리 교외에 거주하고 오르탕스는 아들과 함께 파리에 남게 된 것이다.

둘 사이의 별거에 대해 세잔은 주변에 이렇게 말했다.

세잔은 오르탕스를 처음 만나 사귀고 동거하면서 회화가 밝아졌고 결혼 후 담백하게 깊어졌으며 별거 후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아방가르드한 작가들에게도 신화적 예술가라 불리며 존중받기 시작했다. 그는 오르탕스를 모델이 아니라 아내로 만났기에 그녀를 냉철하게 바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대상을 구체적 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들었다. 감정이입이 된 대상은 아무리 뛰어난 화가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후 고독을 숙명으로 여기고 산 세잔은 다른 사람이 자기 곁에 오는 것도 싫어했다. 나이 들수록 일종의 대인기피증이 더 심해지면서 누가 가까이 오면 멀리 가라고 손짓했다. 특히 ‘갈고리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의 화실에서 ‘갈고리를 치워’라는 고함이 자주 들렸다. 이런 세잔의 유일한 친구는 ‘목로주점’으로 유명한 ‘에밀 졸라’였다.

두 사람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좀 왜소한 졸라가 친구들에게 놀림 받을 때면 세잔이 나타나 해결해 주곤 했다. 이때 졸라가 고마운 마음으로 사과 하나를 주었다. 후에 세잔이 파리에서 화가로 활동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던 초창기 시절 ‘사과’를 그림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나는 세상을 사과로 날리게 하겠다”며 시작된 세잔의 사과 그림은 현대회화의 시작이 된다.

세잔은 화가로 살아가는 내내 사과 정물화를 그렸다. 그 덕에 에덴동산의 사과, 뉴턴의 사과와 함께 역사상 3대 유명 사과가 되었다. 움직여야 하는 인간과 달리 탁자 위의 사과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구도를 연구하는 데 적격이었다. 사물의 본질을 원(圓), 원통(圓筒), 원추(圓錐)라고 본 세잔은 대상의 형태나 질감을 전통적 원근법과 명암법이 아닌 색조와 색의 농담(濃淡)으로 구현했다. 즉, 도드라지는 따듯한 색과 차분한 차가운 색, 그리고 붓의 반복 터치나 가벼운 터치를 이용했다. 세잔의 그림이 얼핏 보면 평면인데 찬찬히 보면 어느 순간 입체감이 나타나며 희열(喜悅)을 느끼게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3억 불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세계에서 비싼 그림이 된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지화면 같지만, 어느 순간 활동영상처럼 느껴지게 된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세잔과 에밀 졸라는 서로가 만나지 못할 때도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교환할 정도였다. 그렇게 절친이었던 두 사람이 뜻하지 않은 일로 결별하게 된다.

에밀 졸라가 새로 쓴 《작품》이란 소설에 실패한 천재가 나오는데, 그가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오해로 1886년 4월 4일, 두 사람은 30년 우정에 종지부를 찍는다. 에밀 졸라가 오해라고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1887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사교성이 없었던 세잔은 은둔에 들어간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지만, 그는 더 깊이 몸을 숨겼다. 그렇게 세인들의 시선에서 사라지면서 그는 신화적 인물이 되었다.

여러 미술관은 그의 작품은 수집하려고 열을 올렸고, 화실 주변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철저히 칩거로 일관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창 너머 들려오는 붓 소리만이 아직도 그가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다.

해수욕

오랜 칩거를 계속하던 세잔은 1906년 야외작업에 나갔다가 독감에 걸린다. 결국 그 일로 세상과 결별하게 되는데, 남겨진 막대한 유산은 아내는 제외하고 아들에게만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긴다. 결국 오르탕스는 세잔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죽는 그 순간까지 두 사람은 철저히 냉랭했다.

세잔이 숨을 거둔 이듬해 파리 살롱가에 세잔 회고전이 열렸다. 이 행사는 “사유와 감각의 일치를 시도해 예술사의 흐름을 바꾼 화가”라는 극찬과 함께 세잔 열풍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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