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출신으로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그림을 그렸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짧은 화가 생활 내내 여인의 초상화만 그렸던 독특한 개성의 작가다. 가느다란 목과 불균형하게 긴 얼굴의 여인들을 그린 그의 초상은 현대인의 불안과 애수를 절묘하게 표현한 걸작들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의 활동 당시 세간의 평은 그리 관대하지 않았다. 그는 피카소가 ‘두목’으로 있던 몽마르트르의 ‘세탁선(Bateau-Lavoir)’ 그룹에서 작품을 가장 팔지 못했던 화가였고 가난과 병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 1920년 서른여섯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런 초상화의 화가 모딜리아니가 잠시 ‘외도’에 빠진 적이 있었다. 1916년과 1917년 사이에 그는 집중적으로 조각과 누드에 탐닉했다. 그리고 이 누드 작품들을 모아 1917년 12월 3일 파리에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그의 개인전은 하루 만에 강제 철거당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개인전이 열린 베르트 베이유 화랑 맞은편에 경찰서가 있었던 게 문제였다. 경관들은 화랑 쇼윈도에 걸린 모딜리아니의 누드 작품들이 ‘음란’하다며 당장 전시를 철거하지 않으면 작품들을 압수하겠다고 위협했던 것이다.
잠든 여인을 그린 이 누드에서도 모딜리아니의 독특한 감각을 읽을 수 있다. 단순하고 거친 선으로 그려진 그의 누드는 이탈리아 고전파의 전통을 잇기보다는 무언가 이국적인, 열대의 느낌을 풍긴다. 모딜리아니는 조각 작업 중에 이집트, 아프리카의 여인 조각상들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다. 조각에 이어진 누드 작업에도 아프리카 원시 조각의 영향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회색빛 배경과 모델의 피부 표면, 머리카락 등을 긁어내린 듯 거친 붓자국으로 마감하고 있는데, 이 같은 방식은 당시 살롱 화가들이 즐겨 그린 ‘매끈하고 부드러운 상아빛 피부’의 누드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모던함과 사실성 때문에 모딜리아니의 누드는 경찰에게 ‘음란화’라는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신체 부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모델의 포즈, 소위 ‘헤어 누드(hair nude)’ 역시 당시 사회 풍조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모딜리아니가 누드 말고 늘 즐겨 그리던 여인들의 초상으로 개인전을 채웠다면 ‘전시 하루 만에 철거’라는 불운만은 면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가난하고 불우한 운명은 모딜리아니를 평생 따라다닐 숙명이었다. 몽마르트르 밤거리의 여자들은 모델을 살 돈이 없는 이 잘생긴 화가를 불쌍하게 여겨 기꺼이 모델이 되어 주었다.
몽마르트르의 카페 ‘로통드(La Rotonde)’에서 늘 사람들을 스케치하거나 단테, 로트레아몽의 시집을 읽던 모딜리아니는 서른셋에 자신의 제자였던 잔 에뷔테른과 동거하며 비로소 짧은 행복을 맛보게 된다. 1918년에는 단 하나의 혈육인 딸도 태어났다.
그러나 늘 병약했던 화가는 1920년 초, 결핵성 늑막염으로 병석에 누운 지 며칠 안 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틀 뒤, 정신착란 상태에 빠진 잔이 임신 9개월의 몸으로 투신자살했다.
모델이 누구인가를 막론하고 모딜리아니의 그림에는 늘 애수 어린 분위기가 배어 있다. 이 누드 역시 마찬가지다. 옆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눈을 감고 있는 모델의 표정에서 일말의 슬픔이 느껴진다. 이 애수 어린 느낌은 화가의 독특한 개성으로도, 또 모던한 감각으로도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