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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비디오 아티스트

o예술가의 삶과 작품

by 송강 작가 2020. 12. 22.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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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를 만들고 발전시킨 현대 예술가이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존 핸하트는 백남준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남준의 작품은 20세기 말 미디어 문화에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텔레비전 방송에 대한 재정의가 이루어졌으며, 비디오는 미술가의 예술적인 수단이 되었다.”

비디오 아트란 비디오, 텔레비전 등의 전자 매체를 표현 매체로 활용하는 예술로, 영화의 연장, 미술의 확장된 개념으로 여겨진다. 비디오 아트의 탄생으로 미술은 회화나 조각의 형태에서 탈피해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면모를 띠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현대 미술의 지형이 바뀌었다. 특히 비디오 아트는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그 작품이 놓인 공간 구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 앞으로 어떤 형태로 발전할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막내로, 아버지 백낙승은 매창방직을 경영하는 한편,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였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예술을 접하며 자랐고, 특히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수송국민학교와 경기보통중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다. 중학교 시절에는 몇 가지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는데, 그중 조벽암의 〈향수〉라는 시를 좋아해 곡을 붙인 작품도 있다. 또한 이 시절부터 인사동의 고서점가를 들락거리며 일본어판으로 된 철학 서적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49년,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홍콩에 따라갔다가 잠시 로이덴 스쿨에서 공부했으며,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에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이주했다. 1952년에 도쿄 대학교 교양학부에 입학했고, 1954년에 미학미술사학과에 진학하여 미술사와 음악사를 전공했다. 1956년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길에 올라 뮌헨 대학과 쾰른 대학에서 미술과 음악을 공부했다. 이때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와의 만남을 계기로 전자음악에 몰입했다.

1959년,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라는 피아노를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이 작품으로 평생의 벗이 될 요제프 보이스와 인연을 맺었다.

1961년, 백남준은 조지 마키나우스, 요제프 보이스 등과 함께 플럭서스(Fluxus) 운동을 주도했다. 플럭서스는 일종의 급진적 미술 운동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독일에서 개화된 국제적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을 일컫는다. 이들은 예술의 관념주의와 형식주의에서 탈피하여 관념보다는 행위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고, 예술과 일상적 삶의 접목을 지향점으로 삼았다.

백남준은 초기 전자음악을 바탕으로 파괴 행위가 주가 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행위로 유명세를 떨쳤다. 얼마 후 그는 비디오 매체에서 음악과 시각을 결합해 다양한 형태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고, 1963년에는 〈음악 전람회-전자 텔레비전〉이라는 첫 번째 개인전에서 미술사상 최초의 비디오 아트를 선보였다. 13대의 TV와 3대의 피아노가 활용된 이 퍼포먼스에서는 영사막을 거꾸로 뒤집어 놓거나 관객이 발로 밟아야 소리가 나도록 조작한 TV가 설치되었다. 이는 관객 참여적, 임의적 예술 형태로, 매체가 지닌 일방적인 정보 전달 구조를 깨뜨리는 퍼포먼스였다.

이듬해 백남준은 뉴욕으로 건너가 비디오 예술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1965년, 그는 비디오 캠코더로 뉴욕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그 영상을 카페 어 고고(cafe a go-go)에서 방영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뉴욕에서 백남준은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함께 음악,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들은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 〈생상스 주제에 의한 변주〉 등 에로틱한 음악과 퍼포먼스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급기야 1966년 〈오페라 섹스트로닉〉 초연에서는 무어만이 상반신을 노출한 채 첼로를 연주하다 경찰에 체포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일으킨 파장은 대단했고, 그 결과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법 개정이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시도했다.

성을 주제로 한 선정적인 음악을 만들고 이를 테마로 하는 퍼포먼스에 대해 백남준은 이렇게 설명한다.

“왜 회화나 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인 성(性)이 음악에서만 금지되는가. …… 음악사는 ‘D. H. 로렌스’나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음악에 누드와 섹스를 도입해 음악의 시각화 작업을 시도했으며, 무엇보다 음악을 시대에 뒤떨어지게 하는 금기의 사슬을 끊고자 ‘성’의 표현을 도입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에로티시즘과 충격적인 퍼포먼스는 그의 작품을 단순한 유흥 혹은 해프닝으로 여겨지게 하기도 했다.

백남준은 TV 모니터들을 여러 개 설치하고 제작된 비디오테이프 영상을 송출하는 비디오 아트 설치예술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런 작업들은 조각과 설치 미술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또한 그는 미술이 지닌 일방향성에서 탈피해 ‘상호작용’ 예술 개념을 도입했다. 예컨대 〈자석 TV〉는 모니터 외부에 자석 막대를 매달아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전자 시그널을 방해하여 TV 화면에 비추는 이미지를 변화시키도록 고안되어 있다. 관객은 자석 막대를 움직임으로써 다양한 추상적 형태 패턴을 볼 수 있다. 또한 〈참여 TV〉는 관객이 버튼을 눌러 화상을 바꿀 수 있는데, 이는 관객을 예술가 혹은 공동예술가로 작품에 참여시켜 관계를 맺는 시도였다.

〈다다익선〉

1988년 9월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비디오 타워로, 1,003개의 TV를 쌓은 탑의 형태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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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들어 백남준은 비디오 설치 작업에 몰입했고, 대표작인 〈TV 정원〉, 〈물고기 하늘을 날다〉, 〈비디오 물고기〉, 〈달은 가장 오래된 TV〉, 〈TV 시계〉 등이 탄생했다.

1974년 작 〈TV 정원〉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로, 전시회장을 열대 숲으로 꾸미고, 그 사이사이에 〈글로벌 그루브〉의 화려한 이미지들이 나타나는 모니터들을 배치한 것이다.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지역적 문화유산의 결합과 상생을 표현한 것으로, 자연화된 문화, 문화화된 자연의 도래를 예견한 선구적인 작품이다. 또한 〈글로벌 그루브〉는 존 케이지와 앨런 긴즈버그의 작품을 활용한 것으로, 예술 행위가 재정의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75년에 발표한 〈물고기 하늘을 날다〉에서는 모니터들을 천장에 매달아 관객이 누워서 보게 하여 감상의 시각을 바꾸는 한편, 여러 장면을 동시에 보여 줌으로써 관객의 지각 변화를 다차원적으로 요구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개최되면서 그의 비디오 아트 세계는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84년 뉴욕 WNET 방송국에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뉴욕 WNET, 보스턴 WGBH 방송국과 협력하여 비디오 아트를 TV로 송출했는데, 이는 예술의 전시 영역을 확장한 시도였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이를 더욱 확장한 것으로, WNET와 파리 퐁피두 센터를 위성으로 연결하여 이브 몽탕, 요제프 보이스, 존 케이지, 앨런 긴즈버그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생중계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바이바이 키플링〉이라는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손에 손잡고〉라는 인공위성 쇼를 발표했다.

1993년, 백남준은 베네치아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대되어 최고 전시관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받았으며, 1995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한국관을 설치하는 데 기여하면서 한국 미술이 세계에 진출하는 길을 열었다.

1996년,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독일 비디오 조각전, 바젤 국제 아트 페어에 참가했으며,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와 같은 ‘레이저 아트’를 선보이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후 백남준은 2006년 1월 29일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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