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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

o예술가의 삶과 작품

by 송강 작가 2020. 12. 20.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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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김수영

4·19혁명이 그의 문학관에 끼친 영향

 

출생-1926년
사망-1968년

목차/접기

  1. 『달나라의 장난』
  2. 4·19 이후부터 「풀」까지

『달나라의 장난』

세상 사람들은 크게 주류와 반주류로 나뉜다. 말할 것도 없이 실세적 권력을 쥐고 현실을 움직여나가는 무리는 주류 쪽이다. 그들은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면서 세계의 틀을 바꾼다. 반주류 쪽은 그 틀을 피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때로는 주류가 만든 틀에 대한 반주류의 불만과 비판, 저항이 따르기도 한다. 주류의 범주에는 정부, 검열 기구, 관료, 국회 의원, 온갖 심의 위원, 고학력자, 자본가, 대학교 총장, 검사, 매스미디어의 실세, 유명 작가, 아버지 등이 속해 있고, 반주류의 범주에는 무당, 집시, 환경 운동가, 독학자, 앵벌이, 백치, 광인, 소수 민족, 비정부 기구, 스트리트 페이퍼, 독립 영화, 재생 용지, 어머니 등이 속해 있다.

시인은 반주류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인물형이다. 어느 시대건 앞서 가는 시인은 당대의 전위에서 현실을 비판한다. 그들은 당대에 부재하는 자유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노래한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으레 정치적 자유를 노래한다. 현실을 장악한 기득권 세력인 주류의 처지에서 보면 그들은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세력이다. 아첨하기를 거부하고 주류의 눈 밖에 나는 일만 골라 하는 그들은 미움을 사고 핍박을 당하기 일쑤다. 주류에 대한 도전은 연금, 가택 수색, 가산 몰수, 투옥, 고문, 사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968년 교통 사고로 숨지기 얼마 전의 김수영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58년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펴낸 김수영(金洙暎, 1926~1968)은 “모든 전위 문학(前衛文學)은 불온(不穩)하다.”는 자신의 외침처럼, 현실의 전위에 서 있던 ‘불온한 시인’이다. 전위는 늘 깨어 있고, 현실의 첨예한 문제들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전위는 현실을 가로지르는 첨단이다. 행동과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전위는 전위가 아니다. 김수영은 이 점을 아주 똑똑히 깨닫고 있던 시인이다. 그는 한 시대의 ‘전위’에 서기 위해, 시대의 반동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반성을 하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곤핍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자신과, 동시에 늘 패배하는 자신의 한계를 투명하게 인식한다. 자신의 문학을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그 방을 생각하며」)라고 규정하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고 노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수영은 근대적 시민 의식에 일찍부터 눈뜬 정신의 소유자로서 치열한 정직성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시인이다.

김수영이 생전에 펴낸 유일한 시집 〈달나라의 장난〉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근대적 시민 의식이란 무엇인가. 이는 삶을 규정하는 테두리로서의 현실과, 제도를 만들고 바꾸어나가는 주체로서의 자기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다. 김수영은 당대의 한국인 가운데 누구보다 일찍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에 눈뜬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눈뜸은 그로 하여금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예술가를 지향하게 하며, 남다른 정직성은 자기 방어적인 양심과 소시민적 폐쇄성 속에 갇혀 있는 자아를 날카롭게 직시하도록 만든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한번 정정 당당하게 /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에 반대하는 /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 삼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김수영,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일부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는 주체로서의 각성과 반성을 보여주는 김수영의 정신적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다. 그의 실천적 이성은 마땅히 “왕궁의 음탕”과 “언론의 자유”, “월남 파병” 같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들에 온몸을 던져야 한다고 느끼는데, 생활 속에서 그는 “옹졸하게”도 “조그만 일에만 분개”한다. 작은 이익에 집착해 아득바득하는 이런 소심하고 한심한 행태에 대한 반성은 도저한 자기 모멸로 이어진다. 설렁탕집 여주인과 야경꾼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소시민의 범주에 든다. 그는 근대적 시민 의식에 따라 요구해 마땅한 정치와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처지가 비슷한 힘없는 이웃들을 사소한 문제로 증오하며 괴롭히는 옹졸한 소시민인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행동(行動)의 죽음”이고, “혁명(革命)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 버”린 비겁함이다.

행동에 나서기보다 일상의 조가비 속에서 방관자로 지내며 나약한 후진국 지식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가 치를 떤 까닭은 바로 이런 비겁함 자체가 퇴폐이고 타락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그를 자기 연민과 비애의 감정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때때로 전위 시인의 불온성을 행동화할 수 없게 만드는 온갖 억압으로 가득 찬 사회 속에서의 고독한 자기 학대로 나아가게 한다. 영원한 자유를 향한 비상과 거듭된 좌절 사이에 걸쳐 있는 김수영의 시 세계는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 시의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1950년대 말, 서울 명동의 한 술집에서 시인 몇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이미 술기운이 올라서 다들 불콰한 얼굴이다. 그들 사이에는 시 얘기며 잡지 얘기, 문단 얘기가 오간다. 다만 유난히 키가 큰 한 사나이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그런데 얘기가 사회와 정치 쪽으로 옮아가자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나이도 말문을 연다. 엔간히 취기가 올라 있던 그는 자유당과 이승만을 마구 욕한다. 한 시인이 제지하려고 들자 그가 대뜸 항의한다.

“아니, 자유 국가에서 욕도 내 마음대로 못 한단 말이오?”

“글세, 김형 말이 도에 지나치니까 하는 말이지.”

“도에 지나쳐? 그럼 이 썩어빠지고 독재나 일삼는 정부며 늙은 독재자를 빼놓고 불쌍하고 힘없는 문인들 험담이나 해서 쓰겠어? 당신 시가 예술 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지나친 조심조심 때문이오.”

이에 상대방이 발끈해 말다툼으로 번지고, 결국 술상까지 엎어져 술자리는 난장판으로 끝난다. 이 키 큰 사나이가 바로 “자유(自由)를 위해서 /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 사람이면 알지 / 노고지리가 / 무엇을 보고 / 노래하는가를 / 어째서 자유(自由)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혁명(革命)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푸른 하늘을」)이라고 노래한 시인 김수영이다.

김수영은 현실의 전위에 선 시인의 불온성을 온몸으로 밀고나가며, 도시 소시민의 내면과 자의식을 해부학적으로 까발려 내보인 이 나라 최초의 현대적 의미의 시인이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온갖 금기며 허위 의식을 깨뜨리기 위해 좌충 우돌하며 그는 종횡 무진으로 애쓴다. 180편 가까운 그의 도저한 요설의 시들은 곧 쉬지 않는 싸움의 도구이고, 싸움의 현장이다. 그는 노래한다.

연애(戀愛)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 속에서도 /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 수업(授業)을 할 때도 퇴근시(退勤時)에도 / 사일렌소리에 시계(時計)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김수영, 「하······ 그림자가 없다」 일부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 6가에서 김태욱(金泰旭)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김수영네 집안은 본디 의관이나 역관, 그리고 부상(富商)들로 이루어진 상층 중인들의 주거지이던 관철동에 있었다고 한다. 무반 계급에 속한 김수영네는 경기도 파주 · 문산 · 김포와 강원도 철원 · 홍천 등지에 널따란 토지를 소유하고 해마다 4백여 석을 거둬들이는 지주 집안이었으나, 일제의 침탈 뒤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서히 몰락한다. 김수영이 태어나던 해에 그의 집안은 관철동에서 종로6가로 이사한다.

그는 집안일을 거드는 여자의 등에 업혀 네 살 때 유치원에 다니고, 다섯 살 때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배운다. 여덟 살 때 어의동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명민한 머리로 우수한 교과 성적을 올린다. 전학년 우등으로 보통 학교를 마친 그는 당대의 수재들이 진학하던 경기도립상업학교에 응시하나 떨어지고 만다.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알고 있던 집안 사람들은 그의 낙방 소식에 울음 바다가 된다. 2차로 응시한 선린상업에서도 떨어져 그는 결국 선린상업 전수과 야간부에 진학하게 된다. 머리가 좋고 성적도 뛰어났으나 상급 학교 입시에 거푸 실패한 것은 잔병 치레가 잦던 그가 보통 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폐렴과 늑막염으로 앓아 누워 1년쯤 학업을 쉰 탓이다.

1941년 김수영은 선린상업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간다. 그는 일본에서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적을 두고 공부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이주한 가족을 따라가 거기서 한동안 연극에 빠져든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 친구와 함께 일고여덟 달 동안 영어 학원을 경영하기도 한다. 이 무렵 연극에서 시 창작으로 진로를 바꾼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廷)의 노래」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그의 등단작인 「묘정의 노래」는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조지훈류의 회고 취미가 압도적”인 작품이다. 그가 연희전문 영문과 4학년에 편입학했다가 이내 그만둔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의 일이다.

선배 시인들의 복고적이고 퇴영적인 언어 관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이 많던 그는 두 번째 작품인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에 이르러 범속한 일상 용어들을 시어로 바꿔놓는다.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 너는 줄넘기 작난(作亂)을 한다 // ······ //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 사물(事物)과 사물(事物)의 생리(生理)와 / 사물(事物)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 사물(事物)의 우매(愚昧)와 사물(事物)의 명석성(明晳性)을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일부

김수영의 시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사물과 현실을 ‘바로 보려는 정신’이다. 이 비타협적인 ‘바로 보려는 정신’이야말로 반주류의 전형성을 드러내는 정신인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고 있던 김수영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이북으로 끌려간다. 평남 야영 훈련장에서 1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북원훈련소에 배치된 그는 유엔군이 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자유인이 되어 남하한다.

그런데 얼마 뒤 그는 서울 충무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고 스스로 전하듯이, 그는 포로수용소 야전 병원 외과 원장의 통역으로 있다가 풀려난다. 그는 이후 미8군 수송관의 통역, 선린상고 영어 교사,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거친다. 서울 마포구 구수동 41의 2로 이사한 1955년 무렵부터 그는 주로 양계와 번역을 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한다.

1950년대 문단에서 김수영은 노랭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던 당시의 문인들은 원고료를 받으면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동료들의 막걸리값으로 풀어야 했다. 그것이 1950년대 한국 문단의 미풍 양속이고 관습이었다. 따라서 원고료를 안주머니에 챙겨 꼬박꼬박 집에 갖다주는 김수영의 행위는 이런 관례를 깨뜨리는 지탄받을 만한 행위였다. 그러나 김수영에게 글쓰기와 번역은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버는 노동이었다. 그는 작품이 발표되거나 번역 원고를 넘기고 나면 신문사나 잡지사로 찾아가 당당하게 원고료를 재촉한다. 창작을 노동으로 생각하는 시인에게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김수영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잡지 편집자는 몇 밤을 새워 번역을 해서 찾아간 김수영에게 대놓고 “당신이 일해 오는 것은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

1960년대가 열리고 4월혁명이 이 땅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김수영의 시 세계는 만개한다. 그의 언어들은 풍자와 해탈 사이로 뚫린 길 위를 질주한다. 그의 시는 독재, 빈곤, 무지, 허위, 속물 근성을 사정 없이 질타하고, 후진국 지식인의 설움을 머금는다.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소시민적 자아의 소심함과 비겁함을 까발리며 그는 치를 떤다. 이처럼 젊은 정신과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언어는 그를 영원한 청년 시인으로 남게 한다.

1967년께 어머니가 사는 서울 도봉동 131번지에서 부인과 함께

나중에 그의 무덤이 뒤쪽 숲 속에 들어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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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6월 15일, 김수영은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신구문화사’에 번역 원고를 넘긴 뒤 고료를 받는다. 그는 이날 밤 신구문화사의 신동문, 늦깍이로 등단한 신예 작가 이병주, 『한국일보』 기자인 정달영과 어울려 청진동의 술집들을 옮겨다니며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다. 술에 취한 김수영은 좌충 우돌하며 횡설 수설하던 끝에 “야, 이병주, 이 딜레탕트야.” 하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이병주는 “김 선생, 취하셨구먼.” 하고 껄껄 웃어 넘긴다. 그들이 헤어진 것은 밤 이슥한 시각. 김수영은 이병주가 운전사 딸린 자신의 폭스바겐 차로 모시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시내 버스를 타고 서강 종점에서 내린다. 그 때 좌석 버스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하면서 인적 끊긴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김수영의 뒤통수를 들이받는다. 갈색 옷을 입고 있던 김수영은 “퍽!” 하는 두개골이 파열되는 소리를 내며 멀찌감치 나가떨어진다. 밤 11시 30분께의 일이었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는 1970년대 중반 ‘민음사’가 기획한 ‘오늘의 시인 총서’ 가운데 한 권으로 나온다. 민음사의 이 기획은 이 땅에 시집의 상업 출판 시대를 연 의미 심장한 기획으로 평가되어 마땅하다.

1968년 불의의 교통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김수영은 근대적 자아 찾기, 온몸으로 자기 정체성 찾기의 한 모범을 보여준 시인이다. 그는 어쩌면 이상(李箱) 이후 최고의 전위 시인이며, 4·19의 정치적 함의를 정확하게 읽어낸 명실 상부한 현대 시인이다. 그는 문학 속에 하찮은 ‘일상성’을 수용하고, 삶이 문학이며 문학이 곧 삶임을 일깨운다. 거칠고 힘찬 남성적 어조의 시 세계 속에 담아낸 소시민적 자아에 대한 가차 없는 자기 폭로, 후진적 정치 문화에 대한 질타, 빈정거림, 맹렬한 비판은 오랫동안 여성적 정조의 전통을 이어오던 한국 시에 대한 반동이며 갱신의 뜨거운 몸짓이다. 「달나라의 장난」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시는 평이한 일상 언어로 소시민적 삶의 단면을 붙잡아낸다. 김수영 시집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여전히 이 땅의 젊은이들이 가장 널리, 그리고 꾸준히 읽는 시집 가운데 하나다.

4·19 이후부터 「풀」까지

4월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으로 완성된다. 난해시에서 참여시로, 서정시에서 혁명시로 나아가던 그는 4·19 전에 내놓은 「하······ 그림자가 없다」에서 이미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고 하며 혁명을 예감한다. 또 “진정한 시인이란 선천적인 혁명가”(「시의 뉴 프론티어」)라고 선언한 바도 있는 김수영은 4월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고 벅차오르는 자유에 대한 느꺼움을 가누지 못해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에 깨어나서는 「기도」 · 「육법 전서와 혁명」 · 「푸른 하늘은」 ·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지만」 · 「나는 아리조나 카우보이야」 · 「거미잡이」 · 「가다오 나가다오」와 같은 시와 「김병욱에게 보내는 편지」 · 「문화의 제언」 같은 산문을 쏟아낸다.

1961년 막내 여동생 송자의 졸업식 때

왼쪽부터 아내, 어머니, 여동생 수명, 김수영, 남동생 수환. 김수영은 8남매 중 장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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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적 일상인의 허위 의식과 양심의 갈등을 딱딱한 구문 속에 담아내던 김수영은 4월혁명과 함께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자유와 정의, 사랑과 평화, 행복을 얻기 위한 혁명에는 피와 고독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의 「푸른 하늘을」은 4월혁명의 성격과 의미를 압축된 문맥 속에 담아낸 작품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자유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 혁명은 본디 ‘고독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노래한다.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 노고지리가 자유(自由)로왔다고 / 부러워하던 / 어느 시인(詩人)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 자유(自由)를 위해서 /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 사람이면 알지 / 노고지리가 / 무엇을 보고 / 노래하는가를 / 어째서 자유(自由)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혁명(革命)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 혁명(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전문

4·19 뒤 들뜬 마음으로 시와 시론을 쏟아내고 서라벌예대 · 서울대 · 연세대 · 이화여대 등에 나가서 강의를 하던 그는 차츰 이 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 예감에 사로잡힌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새로 들어선 제2공화국의 요직을 친일 지주와 관료, 경찰 출신이나 보수적 인사들이 차지할 때 ‘피’를 지불하고 이룩한 혁명은 이미 실패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혁명이 좌절되었다고 느끼자 그는 “제2공화국! / 너는 나의 적이다 / 나는 오늘 나의 완전한 휴식을 찾아서 다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각주1) 고 토로하거나, 체제와 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고 사람만 바뀐 현실 상황에 비애를 느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각주2) ”고 절규한다.

이듬해 5·16이 일어나고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현실에 대한 시인의 환멸과 절망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시인을 정말로 괴롭힌 것은 그토록 혁명을 원했으면서도 스스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소시민적 한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이 “현실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뼈저린”각주3) 인식이다.

일전에도 또 술이 억병이 되어서 눈 위에 쓰러진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가지고 고반소에 데리고 갔다는데 나중에 여편네 말을 들으니 고반소의 순경을 보고 내가 천연덕스럽게 절을 하고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 하고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이 말을 듣고 겁이 났고······.

김수영, 「시의 뉴 프런티어」, 『김수영 전집 2』(민음사, 1981)

혁명의 장애 요소들이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깨달음은 정치와 사회 현실에 주고 있던 그의 눈길을 다시 ‘안’으로 돌리게 한다. 그러나 ‘안’, 즉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라든지 헤어날 길 없는 소시민적 일상은 나태와 허위로 감싸여 있고, 이런 사실은 그를 못 견디게 만든다. 그는 술에 잔뜩 취해 밤 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거지가 되고 싶다고 외치거나, 가족이라는 속된 사슬에서 풀어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쳐서 잠자던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울리는 등 예전보다 심하게 식구들을 괴롭힌다.각주4) 극심한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이런 폭력은 시에서 혁명의 좌절을 가져온 소시민 계급의 안일함과 소극성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는 야유와 욕설로 변용된다.

김수영은 뛰어난 시인일 뿐 아니라 매우 독창적인 시론가다. 「시여, 침을 뱉어라」(1968)와 「반시론(反詩論)」(1968)은 이 사실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의 평론은 발표될 때마다 중요한 문학적 쟁점으로 떠올라 날카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그의 시론은 나온 지 30여 년이 된 아직까지도 거듭 언급되고 있다. 그는 “시인은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으며 또 자유를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생활의 고뇌나 어려움을 맹목적으로 폭로하는 시와 기교만으로 이루어진 시, 즉 극단적 참여시와 순수시 양쪽에 대해 비난을 퍼부어 민중주의자와 기교주의자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특히 1968년 『사상계』 2월호에 「지식인의 사회 참여」라는 평론을 내놓은 뒤 그는 『조선일보』를 통해 이어령과 몇 차례에 걸쳐 문학의 자유와 진보적 자세에 관해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모든 진정한 새로운 문학은 그것이 내향적인 것이 될 때는―즉 내적 자유를 추구하는 경우에는―기존의 문학 형식에 대한 위협이 되고, 외향적인 것이 될 때에는 기성 사회의 질서에 대한 불가피한 위협이 된다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한 철칙을 소홀히 하고 있거나, 혹은 일방적으로 적용하려 들고 있다. 얼마 전에 내한한 프랑스의 앙띠 로망의 작가인 뷔또르도 말했듯이 모든 실험적인 문학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학의 전위성과 정치적 자유의 문제에 관해 이어령과 논쟁하면서 밝힌 불온시에 대한 김수영의 생각이다. 그에 따르면 문학의 본질이 꿈과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고 완전한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므로 문학은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문학이 제도와 갈등을 일으키고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는 문학이나 예술에 위기가 닥치는 것은 문학이나 예술이 정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될 때가 아니라 문학이나 예술이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을 승인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는 위치에 서게 될 때라고 지적한다. 예술이란 불가능한 꿈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불온하다는 그의 발언은 아주 적절하다. 문학이나 예술이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승인할 것을 강요받게 되는 상황이야말로 위기라는 논리 또한 타당하다. 이런 조건 속에서는 가장 자유로운 정신적 작업으로서의 문학이나 예술이 질식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68년 4월 13일, 그는 펜클럽이 마련한 부산의 문학 세미나에 참석해 「시여, 침을 뱉어라」(원래의 제목은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이었는데, 나중에 지면에 발표할 때 바뀐다.)라는 제목으로 40분쯤 강연을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파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발언을 함으로써 청중을 당혹에 빠뜨린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 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새로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김수영은 시의 내용과 형식, 현실성과 예술성은 결코 이원론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내용으로서의 냉철한 의식에 기댄 현실성과 형식으로서의 무의식적인 예술성은 따로 나눌 수 없는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처럼 동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그는 시작(詩作)은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야 한다는, 또는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어야 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김수영은 스스로 몸담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한 준엄한 비판 의식을 시 속에 구현하고자 애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불꽃처럼 치열하게 연소시키며 온몸으로 시를 쓰고, 그 이상을 실천하려고 몸부림친 시인이다. 그의 작품 연보를 살펴보면 1946년 「묘정(廟廷)의 노래」와 「공자의 생활난(生活難)」 등을 발표하며 시작 활동에 뛰어들어, 1950년대의 궁핍하고 혼란한 시기에 ‘후반기’ 동인을 거치며 비로소 자신의 독자적인 문법을 발견하고, 비판적 시선이 날카롭게 심화된다. 이어 자유에 대한 갈망의 구체적이고 극적인 표현인 4월혁명을 기점으로 1960년대에 들어서며 아직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이 땅의 현실과 그의 의식은 첨예하게 부딪치고, 이 때 시인 김수영의 비판적 감수성은 절정의 시편들을 토해낸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개화시키기도 전에 그는 불의의 교통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는데, 죽기 직전에 내놓은 것으로 새로운 변모를 예감케 하는 「풀」을 쓰기까지 그의 시적인 탐색 작업은 한결같이 이어진다.

김수영은 상업 학교를 나왔음에도 숫자를 극도로 싫어해 원고지에 매기는 번호도 자신의 아내나 여동생에게 부탁하곤 한다. 1968년 6월 15일, 그는 이날도 부인이 번호를 매긴 원고를 ‘신구문화사’에 넘겨주고 신구문화사 편집인 신동문과 신동문의 사무실에 들른 이병주 등과 이슥토록 술을 마신 뒤 집으로 돌아가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집 근처에서 좌석 버스에 치인 그는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옮겨지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에 숨진다. 1969년 사후 1주기에 맞춰 그의 무덤에는 시비(詩碑)가 세워지는데, 이 시비에는 김수영이 죽기 보름 전에 쓴 「풀」이 육필(肉筆)로 새겨진다.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전문, 『현대문학』(1968. 8.)

이 시는 ‘풀’과 ‘바람’이라는 명사와 ‘눕다’, ‘일어나다’, ‘울다’, ‘웃다’라는 동사 두 쌍만을 사용해 이를 교묘하게 반복함으로써 뛰어난 음악성을 얻고 있다. 김수영은 외부의 부조리한 압력인 바람을 견뎌내는 들풀의 약한 듯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단순한 어휘와 이런 어휘의 반복을 통해 얻어낸 리듬, 평면적이면서도 소박한 구성으로 형상화한다. 단순하기에 오히려 암시성의 극대화를 가져온 시가 바로 「풀」이다. 이런 까닭에 일부에서는 풀을 민초의 상징어로 읽어 참여시의 표본으로 내세우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대지에 뿌리를 내린 인간의 근본적 삶과 관련된 순수 서정시의 백미로 본다. 이처럼 「풀」에 대한 견해가 엇갈리는 것 자체가, 이 시가 풍부한 의미성을 담고 있는 문제작이라는 증거다.

바람의 동태성(動態性), 즉 비를 몰아오고 풀을 눕히는 능동적인 성질과 풀의 정태성(靜態性)은 한 쌍을 이루며 이 시를 지탱하고 있는 축이다. 이 시는 ‘풀’과 ‘바람’을 통해 의식의 양면성, 즉 안정성과 불안정성, 질서와 무질서, 고요함과 소란함 같은 대립의 양상을 드러낸다. 아무튼 우리가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라는 마지막 행에서 받게 되는 느낌은 어떤 의식의 정화 과정을 거쳐 맑고 환한 공간에 들어선 듯한 놀라운 느낌이다. 이 시는 직설투의 딱딱한 산문 언어에 의한 시작 과정을 거쳐 시인 김수영이 도달한 예술적 심화의 세계를 유감 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김수영은 이 시를 쓰고 나서 보름 남짓 만에 불의의 교통 사고로 세상을 뜸으로써 시 세계가 더욱 깊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되고 만다.

그가 죽은 뒤 1974년 ‘민음사’에서 시선집 『거대한 뿌리』, 1975년 같은 출판사에서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1976년 시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 1979년 산문집 『퓨리턴의 초상』이 잇달아 나온다.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참여주의자에게도, 현실을 외면하는 고도의 기교주의자에게도 동의할 수 없었던 김수영은 죽은 뒤에 더 유명해진 시인이다.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과 열기를 반영하듯이 이후에도 ‘지식산업사’ · ‘창작과비평사’ · ‘열음사’ · ‘미래사’ 같은 여러 출판사에서 다투어 시선집을 내놓는다.

1974년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 시선집 〈거대한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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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는 그 동안 앞장서서 그의 시집과 산문집을 펴내고 ‘김수영 문학상’을 주관해온 민음사에서 『김수영 전집』 전 3권이 나온다. 김수영, 그는 현실과 역사를 정확하게 투시하는 정신의 깊이와 정직한 자기 성찰, 예술가의 순결한 양심과 완전하게 밀착된 시를 쓰려고 했으며, 이렇게 하는 것이 곧 시인에게 부과된 행동과 실천의 길임을 믿은 사람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은 삼중의 싸움, 곧 언어와 자기 자신 그리고 정치 현실과의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김수영은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간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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