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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o예술가의 삶과 작품

by 송강 작가 2020. 12. 22.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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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김환기는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로, 전통적인 한국의 미에 서구 모더니즘을 결합시킨 화가이다. 20세기 한국 미술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를 논하지 않고는 한국 현대 미술의 좌표를 읽을 수 없다고까지 평가되는 작가이다. 친구이자 동료였던 화가 최순우는 그에 대해 “한국의 멋을 폭넓게 창조하고 멋으로 세상을 살아간 예술가”라고 말했다.

김환기는 1913년 2월 27일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부농 집안의 1남 4녀 중 넷째로 유복하게 자랐으며, 후일 그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자연의 서정성은 이때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김환기는 서울 중동중학교를 거쳐 19세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 니시키시로(錦城) 중학교와 니혼(日本) 대학 예술학원 미술학부에서 공부했으며, 졸업 후에도 2년간 대학 연구소에 있었다. 이때 도고 세이지 등에게 입체파와 미래파 등 서구 미술 사조를 접했으며, 곧 아방가르드 계열의 추상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대학 시절 ‘아카데미 아방가르드’라는 미술 연구회를 조직하고, 백만회를 결성했다.

1935년, 제22회 이과전(二科展)에서 입체주의적 표현 기법이 드러난 〈종달새 노래할 때〉로 입선하면서 일본 화단에 발을 들여 놓았고, 1936년에 도쿄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37년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1940년까지 〈론도〉, 〈창〉 등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자유전)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들은 기하학적 형태로 구성된 비대상 회화로,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 회화이다. 특히 〈론도〉는 대한민국근대문화재로 지정, 등록되어 있다.

1940년과 1952년에 서울과 부산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1948년에는 신사실파를 조직하고 홍익대학교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했다. 귀국 후 해방과 전쟁을 거치는 동안 잠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으나, 이 시기에 그는 한국적 소재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 백자를 비롯해 산, 학, 매화, 사슴 같은 이미지에 탐닉했다. 이런 애정에서 탄생한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독자적인 한국적 추상의 세계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달과 항아리’ 주제에서 잘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항아리와 여인들〉, 〈항아리와 매화〉, 〈나무와 달〉, 〈달과 항아리〉 등이 있다.

해방과 한국 전쟁 등으로 혼란한 시대에 작품에 매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쟁과 피난이라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고, 힘든 상황을 오히려 낭만적으로 승화시켰다. 〈판잣집〉, 〈피난 열차〉, 〈뱃놀이〉 등에서는 그가 지닌 예술적 낭만성이 풍부하게 배어 나온다.

1956년, 김환기는 작품 활동을 위해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서도 그는 한국적 소재들을 조형적으로 재해석하고자 끊임없이 연구했고, 1959년 귀국할 때까지 파리, 니스, 브뤼셀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이 시기에 서구 작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잃을 것을 우려해 루브르 박물관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귀국한 후에는 유네스코 국제조형예술협회 한국본부 회장,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장 및 홍익미술대학(홍익대학교가 1961년 대학정비령에 따라 일시 홍익미술대학으로 개칭) 초대 학장을 역임했고, 대한미술협회 부이사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 바쁘게 활동하면서 한국 미술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1963년, 그는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고자 브라질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구, 특히 국제 미술의 주류로 발전하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바쁜 활동으로 작품을 소홀히 했던 데 조급함을 느낀 그는 붓을 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에서 김환기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추상 세계를 확립하고, 이전 작품들과 형식적, 내용적으로 완전히 다른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화단은 추상표현주의가 심화되는 단계에 있었고, 팝아트가 화단의 주류로 여겨졌다. 이런 경향 속에서 그는 미국적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편, 한국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 자연주의적인 세계를 그려 냈다. 뉴욕에 도착한 이듬해 그는 첫 번째 개인전을 열고 〈산〉, 〈산월〉, 〈야상곡〉 등을 선보였다. 이 무렵까지는 색과 면을 이용한 추상화를 작업했으나,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독창적인 방식의 점화(點畵)를 제작했다.

1970년, 김환기 작품 세계의 절정이라 일컬어지는 전면점화(全面點畵)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탄생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한 이 작품은 단색 톤의 점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한국 화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그해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검은색, 회색, 청색 등의 절제되고 통일된 톤으로 화면을 가득 수놓은 점들이 하나의 형이상학적 공간, 우주를 창조하며 보는 사람에게 신비로운 감정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이후 김환기는 대작 점화에 몰두하면서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만년의 대표작에서는 자연의 외형은 사라지고 활형과 직선으로 점들이 교차되는 형태가 두드러지는데, 이를 통해 화면 공간은 확장되고 우주적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또한 작품 전체에서 자연과의 정신적 합일, 한국적 감수성이 물씬 드러난다.

1974년부터 그의 건강이 점차 나빠져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김환기는 죽는 순간까지 초인적인 창작 욕구를 발휘해 〈09-05-74〉, 〈07-Ⅶ-74〉 등의 작품을 그렸다. 그리고 1974년 7월,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참고
그의 부인 김향안, 수필가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의 처
작가 김환기와 재혼한 뒤
본명 변동림에서 김향안으로 개명
파리에서 미술평론 전공함
김환기의 파리 뉴욕 유학을
제안함
부암동 김환기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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