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
오경은
우울할 땐 은박지를 긁어요, 저마다 은박지와 동전이란 게 있잖아
스스로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린
꽝의 확률은 잊어라, 잊어라
맨발로 떠도는 광신도의 얼굴로
복권을 사는 사람들처럼
뭐라고 쓰여 있나요
당신도 내가 보고 있는 걸 보고 있나요, 아니겠죠
의심이 필요없는 순간에 서로를 못 믿을 만큼 성실해본 적도 없으면서
새살이 차오르는 것처럼
긁은 자리가 다시 차올라요
아무리 긁어도 찢어지지 않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외로움이 필요할 때마다 은박지가 벗겨진 자리에 새겨져 있던 문구를 잊었다
가난을 동경하라
죽은 사람을 추종하라
지리멸렬한 영원을 꿈꾸라
수북이 쌓여가는 은박지 재, 빛나는 개미떼
알아듣지 못해도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있어서 자꾸만 아름다워져 가, 초조해
저마다 은박지와 동전이란 게 있어서
우리는 신이 되어가고 있다
가난한 계시에 중독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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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중앙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오경은 시인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동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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