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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고라니의 똥빛깔에 대하여/ 복효근

o문학 세상

by 송강 작가 2017. 9. 27.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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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고라니의 똥빛깔에 대하여/ 복효근


  꽃샘이 매서운 이른 봄
  막 맺혀 올라오는 튤립 몇 포기를 무엇이 뜯어먹었다

  순간 며칠 전 눈 내렸을 때 마당에 와서 서성이던 고라니 한 마리
  필시 그놈이려니
  그런데 고라니가 튤립도 먹나
  배고프면 못 먹을 것도 없지

  참 고얀지고 
  애써 가꾼 꽃이 피기도 전에......
  앞으로도 와서 해코지 하면 어떡하지 걱정하다가
  얼마나 다급했으면 꽃을 먹었을까 생각도 하다가

  왜 몽땅 뜯어먹지 않았지 생각하자니
  심고 가꾼 이의 마음을 헤아렸거나
  이제 어린싹이 무척 안쓰럽기도 했던 거라

  다 뜯어먹지 않고 화단 한 귀퉁이만 뜯어먹은 게 고맙기도 하고
  다른 화초들을 먹지 않은 게 감사하기도 해서
  뽑힌 튤립 뿌리를 묻어주는 데 
  아, 거기 큰 고라니발자국 곁에 작은 발자국
  배고픈 권속이 하나 더 있었구나

  이게 이 집 쥔이 좋아하는 튤립이란다 엄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기는 참지 못하고 몇 포기 뜯어먹었겠지
  그리곤 꽁지 빠지게 돌아갔겠지
  그 놈 오늘 아침 싼 똥에서 선홍빛 튤립향이 나기도 하겠다

『문예바다』(201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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