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미셸 바스키아
벽이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를 예술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 화가. 1980년대 극단적인 추상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신표현주의와 원시주의 성향의 작품을 제작하면서 일약 스타 화가로 떠올랐다. 주류 미술계에서 볼 수 없는 길거리 화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작품 외적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협업을 제안한 앤디 워홀과의 관계도 유명하다.
1960년 뉴욕에서 아이티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덕분에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도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어머니는 그에게 일찍부터 미술을 가르쳤다. 그를 데리고 미술관을 자주 갔으며 여섯 살 때는 미술관에서 미술 강좌를 듣게 했다. 여덟 살 때 우연히 해부학 교과서를 보면서 근육, 골격, 장기 등 인체의 구조와 형태에 익숙해졌다. 이런 해부학적 이미지들은 그의 그림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 부모님의 별거로 바스키아는 아버지와 함께 푸에르토리코에서 2년을 살았다. 열한 살 때는 어머니가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열다섯 살에 가출해서 길거리 생활을 했는데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세이모(SAMO, Same Old Shit의 약자로 마약류를 지칭하는 비속어이다)’라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그룹을 결성하여 근처 빌딩에 그래피티를 그렸다. 1978년 〈빌리지 보이스〉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세이모를 소개하면서 바스키아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9년 바스키아는 세이모 활동을 그만두고 방송 출연과 록밴드 활동을 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0년 여러 아티스트가 참여한 타임 스퀘어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주목을 끌었다. 1981년 애니나 노제이 갤러리에서 작업실을 제공해 주어 그림 작업에 전념했고 이듬해 같은 갤러리에서 열린 최초의 개인전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후 바스키아는 성공 가도를 달렸다. 1982년에는 이탈리아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 최대의 상업 갤러리인 개고시언 갤러리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펑크 록의 대부 데이비드 보위와도 작업했다.
1983년 당시 미술계의 중요 딜러인 브루노 비쇼프버거의 제안으로 앤디 워홀을 만나 공동 작업을 몇 차례 진행했다. 워홀이 먼저 작업을 하면 바스키아 그 위에 덧그리는 방식으로 진행된 작업이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둘은 가깝게 지냈다. 1983년 미국에서 최고 권위 있는 비엔날레인 휘트니 비엔날레에 최연소 화가로 참가하고, 1985년에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하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높아져 가는 명성과 경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마약에 빠지고 말았다. 앤디 워홀이 1987년 사망하면서 바스키아는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린 상실감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으며, 이를 달래려고 더욱 더 약물에 의존했다. 결국 헤로인 중독으로 1988년에 사망했다.
바스키아는 인종차별주의 비판, 만화, 죽음, 해부학 등의 주제를 낙서 속에 담아냄으로써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켰고 신표현주의의 유명주자가 되었다. 그림에 대한 천재성과 원시미술을 연상시키는 스타일 때문에 ‘검은 피카소’라는 별명을 얻었다. 거리의 부랑아에서 하루아침에 스타 예술가로 짧은 생을 마감한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