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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o미술 세상

by 송강 작가 2020. 12. 22.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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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가볍게 나는 무희들의 모습이 눈에 익으면 마치 그들이 당장이라도 살아날 것처럼 보이고, 헐떡이는 숨결이 느껴지고, 귀를 찢는 듯한 바이올린 선율 위로 실수를 지적하는 무용 선생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완벽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1880년,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된 에드가르 드가의 작품에 대한 평이다. 대중에게 발레리나의 화가로 잘 알려진 드가는 인상파 화법에 더해 정교한 인물 소묘, 일상의 순간을 사실적으로 포착함으로써 독자적인 노선을 확립한 화가이다.

드가는 1834년 7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귀스트 드가는 나폴리 은행가의 아들로 프랑스에 유학을 왔다가 미국 부호 집안의 상속녀인 셀레스틴 뮈송과 결혼하여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에드가르는 그중 장남으로 조부와 외조부의 이름을 받아 일레르 제르맹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그가 태어났을 무렵 오귀스트는 할아버지 일레르의 은행 파리 지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에드가르는 13세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는 평생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어린 시절 학업 성적은 좋은 편이었으나 공상을 즐겨해 선생님들에게 종종 꾸지람을 들었고, 그림을 좋아해 아버지와 함께 루이 라 카즈 같은 유명 미술 수집가들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이탈리아의 고전 작품들을 좋아했는데, 이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대부분의 천재 화가들이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능을 드러낸 반면, 드가의 그림 실력은 평범했다. 하지만 그는 일찌감치 화가를 자신의 길로 삼았다. 드가는 1853년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를 졸업한 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나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늘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지내던 그는 결국 법대를 중도에 포기하고 앵그르의 제자인 아카데미 화가 루이 라모트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성실하고 인내심 깊은 성격이었던 드가는 인물을 끈기 있게 관찰하고 옛 거장들의 작품을 정밀하게 모사하며 실력을 키웠다.

“거장들의 작품은 몇 번이고 모사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사를 제대로 한 이후에야 무 한 개라도 제대로 그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그는 정확한 표현 기교를 기르는 데 집중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소묘들은 기초가 탄탄하며, 정교하고, 고도로 숙달된 솜씨를 자랑하기로 유명하다.

1855년, 드가는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로 진학했으나 수업을 그리 열성적으로 들은 것 같지는 않다. 2학기 수업에 복귀하지 않고 이듬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 3년간 체류하면서 그는 박물관, 미술관 등지를 다니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할아버지 및 친척들과 교류하며 초상화를 그렸다. 아버지 오귀스트는 그의 그림을 보고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라고 독려해 주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드가는 파리에 정착하여 살롱전에 출품할 작품을 그렸다. 이때 〈제프테의 딸〉, 〈바빌론을 건설하는 세미라미스〉, 〈스파르타 젊은이들의 훈련〉 등 고전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드가는 역사적, 신화적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컨대 〈스파르타 젊은이들의 훈련〉에는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디아를 배경으로 한 이상적인 육체 대신 광활한 황야와 파리의 부랑아 같은 인물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동료 화가들이었다면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이야기를 세심하게 재구성했을 터였다. 이처럼 드가는 데뷔 초기부터 본질적으로 당대 프랑스 화풍과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스파르타 젊은이들의 훈련〉

런던 내셔널 갤러리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865년까지 드가는 수많은 그림을 그렸으나 자신의 작업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방황을 거듭했다. 이 시기에도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꾸준히 모사 작업을 했는데,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하던 중 에두아르 마네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신랄한 비평을 주고받으며 15여 년간 우정을 유지했다. 드가는 마네가 소개한 (훗날 인상파 화가라고 불리게 될)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등 젊은 화가들을 비롯해 제임스 티소, 쿠르베 등 동료 화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았고, 일본의 우키요에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인 주제를 포기하고 점차 파리의 분주한 도시생활로 작품 주제를 옮겨 갔다. 1865년부터 드가는 꾸준히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번번이 낙선했고, 결국 1870년을 마지막으로 살롱전을 거부하고 인상파 전람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1870년대 초는 혼란의 시기였다.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 전쟁(보불 전쟁)이 발발했고, 결국 프랑스가 패배하고 프로이센이 베르사유를 점령했다. 민중은 프랑스 정부의 무능함에 반발하고 혁명 정부인 파리 코뮌을 결성했으나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완전히 진압당하고 제3공화정이 수립되었다. 보불 전쟁이 발발하자 드가를 비롯해 마네, 프레데리크 바지유, 조제프 퀴빌리에 등 예술가들도 속속 프랑스 국민군에 입대했다.

드가는 포병대에서 복무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런던을 거쳐 친지들이 있는 뉴올리언스로 갔다. 그는 군대 이동 중에 만난 인물들을 비롯해 동료들의 모습을 그렸고,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발레 연습 장면과 오케스트라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뉴올리언스에서 그린 〈뉴올리언스의 목화 거래소〉는 드가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데, 그는 이 무렵부터 그동안 이따금 매달렸던 역사 주제를 완전히 버리고 근대 생활 모습을 다루게 된다. 그는 인물들의 공간 배치와 빈 공간이 주는 효과에 흥미를 느꼈고, 일상적인 주제를 사실적인 시각에서 관찰하여 표현하는 데 이를 적용했다.

〈뉴올리언스의 목화 거래소〉

포 미술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874년부터 드가는 인상파 전시회에 대부분 참여했으나, 그럼에도 자신은 인상파 화법과 거리가 있다고 여겼다. 예컨대 마네 등 인상파 화가들은 정교하지 못한 데생으로 비판받았으나 드가는 누구보다 정밀한 인물 데생을 추구했다. 그는 정확한 표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늘 발레나 오케스트라의 실제 연습 장면을 꼼꼼하게 스케치하고 돌아와 그를 바탕으로 실제와 거의 차이가 없는 그림을 그렸다. 이 때문인지 그는 무대 위 장면보다는 발레 수업 장면이나 무대 뒤의 모습을 많이 그렸는데, 이런 그림들은 대중에게 매우 좋은 반응을 받으며 팔렸다.

〈발레 수업〉

파리 오르세 미술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애호가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드가는 명성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재정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1874년 늘 ‘사랑하는 아빠’라고 불렀던 아버지 오귀스트가 죽자 드가는 실의에 빠졌다. 평생 재혼도 하지 않을 만큼 아내를 사랑했던 오귀스트는 아내가 죽은 뒤 실의에 빠져 은행 경영을 방치해 회사 재정이 엉망이었고, 사랑하는 막냇동생 르네는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할아버지의 유산인 나폴리의 재산도 친지들과 분할하기 힘들었다.

이에 드가는 작품을 파는 일에 좀 더 매진했고, 인상파 화가들과 노선이 다르다고 생각했음에도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인상파 전람회에 많은 그림을 출품했다. 드가는 점차 인상파의 리더로 여겨졌다. 하지만 인상파에 대한 세간의 비난을 함께 받은 한편, 인상파 애호가들에게는 ‘호사 취미’에 영합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완숙미의 절정에 이른 그의 발레리나 그림들은 수많은 애호가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1880년대 전후로 드가는 발레리나들을 비롯해 목욕하는 여인이나 카페 콩세르의 여인들, 매춘부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조각도 했으며, 작은 청동상들도 제작하며 명성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잘 팔렸다. 미술계의 거장으로 대우받았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진중하고 말이 없으며 회의적인 면모를 지녔던 드가는 이 무렵에 이르러 부와 명성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목욕 후 목덜미를 닦는 여인〉

파리 오르세 미술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독신생활의 외로움, 나이 드는 것과 노쇠, 친구들의 죽음과 가까운 지인들이 멀어져 가는 데 대해 주기적으로 우울해하고 인생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오페라에 몰두하고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우울증을 달랬다. 그런 한편 고갱이나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점차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하지 않게 되었다. 1890년대 말부터 드가는 점점 자기 안에 고립되어 작업실에 틀어박혔고, 경제적으로 풍족했기 때문에 그림을 파는 일도 드물었다. 그의 고독은 점차 심화되었다. 함께 시대를 풍미했던 동료 화가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그는 시력과 청력을 잃어 갔다.

죽을 무렵에는 한쪽 눈을 완전히 실명했고, 나머지 눈도 비슷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죽기 전 5년 동안은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드가는 친구들에게 자주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데 따른 상실감을 토로하며 우울해했으나 좋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83세의 나이였다. 시신은 몽마르트르 언덕의 가족 묘지에 묻혔고, 그가 팔지 않은 수백 점의 그림들은 고가에 팔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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