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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o예술가의 삶과 작품

by 송강 작가 2018. 1. 22.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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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어린 왕자  앙투안 생텍쥐페리 Antoine Marie-Roger de Saint-Exupéry

출생1900년 06월 29일
사망1944년 07월 31일
국적 프랑스
대표작《야간 비행》, 《전투 조종사》, 《어린 왕자》 등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비행소설 장르를 개척하였으며,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공상과 고독이 빚어낸 작품들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았다.



어린 시절의 생텍쥐페리

소설의 내용대로만 보면 화자(話者)는 매우 유복한 사람이다. 현대도 그렇지만 소설이 쓰인 1940년대에 자가용 비행기를 갖고 세계 일주를 한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가 프랑스 귀족 중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왕자』 곳곳에 남다른 순진함이 묻어나는 이유도 그의 성장 배경이 순수하고 특수하기 때문이다.

B-612라는 별에서 온 어린 왕자는 크고 작은 일곱 개 별을 방문한다. 그중 마지막 별, 즉 일곱 번째로 방문한 별이 지구다. 어린 왕자는 지구에서 지혜로운 여우 한 마리를 만나게 된다. 어린 왕자가 친구가 되자고 제의했으나 여우는 길이 들지 않아서 친구가 될 수 없노라고 말한다. ‘길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여우는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해준다.

길들인다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된 어린 왕자는 정원에 핀 수많은 꽃이 자기의 장미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장미들이 자기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여우를 만난 어린 왕자

이와 같은 설명은 『어린 왕자』가 다소 신비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린 왕자는 말 그대로 어린아이인데 얼마나 심오한 이야기를 하는지 보자.

추락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물이 떨어졌다. 어린 왕자와 함께 샘물을 찾아 나섰다. 별들이 보였다. “별은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이 말을 듣고 나는 이 모래의 신비로운 빛남을 이해하게 되었다. 왕자는 잠이 들었다. 잠든 왕자가 내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이 애가 꽃 하나에 충실한 것 때문이었으리라. 어린 왕자가 지구에 떨어진 지 일 년이 되던 날. 그는 우물가의 벽에 올라앉아 노란 뱀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돌아갈 것이라고 쓸쓸히 말했다. “내 별이 작아 보여줄 수는 없어. 모든 별을 봐. 그 중의 어느 하나에서 내가 웃고 있겠지. 그러면 아저씨에게는 모든 별이 웃는 것 같이 보이겠지. 결국 아저씨는 웃을 줄 아는 별을 가진 거야.”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

『어린 왕자』가 지금도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어린 왕자라는 연약하고 순결한 어린이의 눈을 통하여 잊히고 등한시되었던 진실들을 하나하나씩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 구렁이의 그림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과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전체에 흐르는 중심 사상이다.

이 작품에서 생텍쥐페리는 여우를 통해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보는 진실성을 점차로 상실해가고 있는 오늘의 어른들, 즉 삭막한 물질문명에 찌든 사람들로 가득한 현실을 고발했다고 볼 수 있다.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의 비행사이자 소설가로, 시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아름다움이 담긴 글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고양된 인식으로 '고독한 몽상가', '지상의 어린 왕자'로 불리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작가이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1900년 6월 29일 프랑스 리옹 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 드 생텍쥐페리 백작이고, 어머니는 프로방스 지방 귀족인 마리 부아이에 드 퐁스콜롱브이다. 4세 때 아버지가 괴한의 습격으로 사망하자 어머니를 따라가 외가인 샤를 드 퐁스콜롱브의 라몰 성에서 자라났다. 음악가이자 화가였던 어머니 마리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색적인 소년이었던 앙투안의 문학적 성향을 북돋아 주었고, 앙투안은 어린 시절부터 평생 어머니와 깊은 유대를 맺고 살았다.

8세 때 리옹의 몽 생 바르테레미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이듬해 친할아버지가 앙투안의 가족들을 불러들이면서 망스로 이주해 예수회 소속인 생트 크루아 중등학교를 다녔다. 학창 시절에는 다소 엉뚱하고 주의가 산만한 학생이었으며, 학교 수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가족들과 함께하는 바캉스였다고 하는데, 5남매 중 셋째였던 앙투안은 누이들과 남동생들, 어머니와 어울려 화목한 가정생활을 누렸다. 때문에 15세 때 남동생 프랑수아가 죽자 그는 큰 상처를 입었다. 동생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와 이때 죽음의 의미에 대해 고민한 상념들은 20여 년 후 회고록, 30여 년 후 《전투 조종사》를 통해 나타난다.

유년 시절 생텍쥐페리에게 가장 중요한 경험은 12세 때 집 근처에 있던 앙베리외 비행장을 들락거리면서 한 첫 비행이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하고 비행을 자신의 업으로 택하게 된다.


15세 때 스위스 프리부르에 위치한 마리아회 학교에 입학하여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17세 때 대학 입학자격고사에 합격하여 파리로 왔다. 그러나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던 앙투안은 두 차례 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하고, 20세 때 파리 예술대학에 입학하여 건축학을 공부했다. 이 때문에 학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방랑하다 군에 입대했다. 스트라스부르의 제2전투기 연대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으며,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해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비행사로 파견된다. 그는 후일 군대 생활은 지루했지만 카사블랑카에서 '시정 넘치는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2년 만에 비행 사고를 당해 두개골 골절상을 입으면서 소위로 의가사제대를 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비행에 대한 열정을 놓지 못했다.

제대 후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앙투안은 군 입대 전에 만난 루이즈 드 빌모랭과 약혼했으며, 그녀와 결혼하고자 민간 조종사라는 꿈을 포기하고 부아롱의 기와 공장에 들어가고, 소렐 자동차 회사의 판매 대리인으로 일하는 등 직업 생활을 전전했다. 생텍쥐페리는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방황을 거듭했으나, 사교계의 명사이자 여류 작가였던 빌모랭과 몽상적이고 까다로운 생텍쥐페리는 애초에 잘 맞지 않는 짝이었다. 두 사람은 2년 만에 파국을 맞는다.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생텍쥐페리는 시와 산문 습작을 하면서 출판계 인사들과 접촉한다. 그리고 1926년 〈은빛 배〉 지에 중편소설 〈비행사〉를 발표한다. 편집장 장 프레보는 생텍쥐페리의 '섬세한 묘사력'에 찬탄을 보냈으나, 당시 생텍쥐페리는 글보다는 돈이 될 만한 일을 찾아다녔다. 그는 프랑스 항공에 입사하여 관광객들을 태우고 다니는 비행선을 조종하며 돈벌이를 잠시 하다가, 에어프랑스의 전신인 라테코에르 항공사에서 기술자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야간 비행》 속 모델들인 디디에 도라, 기요메 등과 친분을 나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텍쥐페리는 우편 비행사로 일했고, 3년 후에는 아르헨티나 아에로포스탈 항공사에서 항로 개발 책임자로 임명되어 새로운 항로 개척에 나선다. 생텍쥐페리는 사고를 당한 비행사들을 구조하러 가기도 하고, 비행기 고장 때문에 아프리카 다카르 사막에 체류하기도 했으며, 1930년에는 절친한 동료 기요메가 안데스 산맥 횡단 중에 실종되자 구조 작업에 나선다. 비행사로서의 경험들은 1929년 《남방 우편기》, 1931년 《야간 비행》, 1939년 《인간의 대지》에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다.

《남방 우편기》를 출간하면서 생텍쥐페리는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으며, 그해 시민 항공 부문 레종 도뇌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야간 비행》으로는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은 미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클라크 케이블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끈다.

생텍쥐페리가 직접 그린 《어린 왕자》 삽화



생텍쥐페리는 1931년 과테말라 출신 작가 엔리케 고메즈 카리요의 미망인이던 콘수엘로 순신과 결혼했다. 그는 그녀에게 헌신적인 애정을 바쳤으나 이전 약혼자 빌모랭보다 더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콘수엘로와의 결혼 생활은 파란만장하기 그지없었다. 콘수엘로는 예쁜 외모에 유머 감각과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했으며, 주변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데 일가견이 있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앙리 장송은 "이 새는 제자리에 얌전히 있지 않는다. 생텍스라는 거대한 곰, 그 큰 곰 위에 제멋대로 올라타곤 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어린 왕자》에서 장미꽃과 사막여우의 일화는 생텍쥐페리와 그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후 몇 년간 그는 작품을 집필하면서도 이따금 비행 일을 했으며, 사고도 여러 번 당했다. 1932년에는 시범 운행 중 추락 사고를 겪었으며, 1935년에는 에어프랑스 소속으로 사이공에 갔다가 리비아 사막에 추락하여 5일 만에 구조되었다. 1938년에는 푸에고 섬 항로의 시험 비행을 하고 돌아오던 중에 과테말라에 불시착해 중상을 입었다. 그런 한편 〈파리 수아르〉 지의 해외 특파원으로도 활동했는데, 1935년에는 모스크바, 1937년에는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도 했다.

1939년 2월, 《인간의 대지》가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아카데미 프랑세즈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그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생텍쥐페리는 9월에 입대하여 이듬해까지 정찰비행대 소속으로 활약했다. 이 전쟁으로 기요메를 포함한 동료들이 모두 사망하면서 생텍쥐페리는 전쟁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그는 "기요메가 죽었다. 오늘 저녁 내겐 더 이상 친구가 없는 듯하다."라고 당시의 절망적인 심경을 표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성채》를 쓰는 데 집중했는데, 농담 삼아 '유작'이라고 말하던 이 작품은 실제로 미완성 유작으로 남는다. http://blog.naver.com/sigamja2/221021209195

1941년에는 전쟁 복무 경험을 토대로 《전투 조종사》를 집필했으며, 이 작품은 이듬해 《아라스 비행》이라는 제명으로 미국에서도 거의 동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매진될 정도로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나, 작품 속 유대인 비행사 이스라엘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가 문제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판매 중단 조치를 받았다.

1943년에는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와 《어린 왕자》가 출간되었다.

《어린 왕자》는 생텍쥐페리의 고뇌와 형이상학적 관념들이 집결된 작품으로,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던 어린 소년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어른을 위한 이 매혹적인 동화는 오늘날까지 160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며, 누적 판매부수가 1천억 부에 달하면서, 《성경》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다음으로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7년 프랑스에서 발행된 생텍쥐페리와 어린 왕자가 새겨진 지폐


독일과 연합군의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생텍쥐페리는 3월에 연합군 진영에 합류하여 훈련을 받고 6월에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알제리로 갔다. 이듬해 5월 이탈리아 사르데냐 알게로에 주둔하던 233정찰대에 복귀하여 임무를 수행했고, 그해 7월 31일 마지막 정찰 비행을 떠나 실종되었다. 당시 시신도, 비행기의 잔해도 찾지 못했으며, 실종 자체에 대해서도 자살이거나 의도적 실종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대두되었다. 일각에서는 지상에 내려온 '어린 왕자'가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별'로 돌아갔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2000년 프랑스 마르세유 근해에서 생텍쥐페리와 함께 실종되었던 P38 항공기의 잔해가 발견되었고, 2004년 추가로 수중에서 잔해가 발견되면서 생텍쥐페리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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