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로 불린 화가
르네 프랑수아 길랭 마그리트(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René Magritte
출생 | 1898년 11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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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7년 08월 15일 |
국적 | 벨기에 |
대표작 | 〈길 잃은 기수〉, 〈이미지의 반역〉, 〈인간의 조건〉, 〈빛의 제국〉, 〈투시도-다비드의 마담 레카미에〉 등 |
일상에서 접하는 친근한 사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현실 감각을 뒤틀었으며, 팝아트라는 새로운 사조를 창출했다.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친숙한 대상을 생소한 배경에 배치하거나 말과 이미지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양자의 괴리를 드러내 보는 이들의 현실 감각을 뒤흔드는 작품들로 유명하다. 마그리트는 화가보다 철학자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헤겔, 베르그송, 하이데거 등의 철학서들을 탐독하고 그 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나는 회화를 이용하여 사유를 가시화한다.”라는 말이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가 될 듯하다.
마그리트는 1898년 11월 21일 벨기에 남부 지역의 공업 도시 에노 레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복 재단사이며, 어머니는 모자 상인이었다. 그는 〈팡토마〉 같은 범죄모험영화와 탐정소설, 에드거 앨런 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등이 쓴 소설을 매우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14세 때 어머니가 강에 투신자살을 하면서 유년 시절은 끝이 났다. 그는 어머니의 시체를 건져 내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으며, 어머니의 얼굴을 덮은 드레스 자락의 이미지는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평생 영향을 미쳤다(이 이미지가 〈연인〉이라는 작품에 투영된 것이 아니냐는 비평이 있었으나 그는 부인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르네와 다른 두 아들을 데리고 샤를루아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고전을 공부했으며, 18세 때부터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회화를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인상파와 입체파 양식의 회화를 시도했으며, 그래픽 아트를 배웠다. 졸업한 후에는 포스터와 광고 디자인 등 상업 미술가로 일했는데, 이 무렵까지는 화가가 되겠다는 대단한 열정을 품지는 않은 듯하다.
1922년은 마그리트에게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그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마리 조르제트 베르제와 결혼했으며, 그해 시인 마르셀 르콩트가 보여 준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사랑의 노래〉 복제화에 큰 충격을 받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키리코는 건물 풍경, 버려진 광장, 잘린 고전주의 시대의 조각 등을 기묘하고 음울한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초현실주의를 예고하는 작품을 제작한 인물이다. 마그리트는 한동안 광고 디자인으로 생계를 꾸렸으나 1926년 브뤼셀의 라상토르 화랑과 계약하면서 회화 작업에 집중적으로 몰입했다. 그해 그는 60여 점의 작품을 그렸고, 초현실주의적 작품 〈길 잃은 기수〉(1926, 같은 제목으로 1948년에 더욱 정돈해서 그린 그림도 있다)로 주목받게 되었다.
1927년부터 3년간 마그리트는 파리에 머물며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등 초현실주의자들과 깊은 우정을 쌓았으며,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가담했다. 초현실주의 그룹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근거로 하여 무의식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기법으로 자동기술법과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을 창안했다. 데페이즈망이란 ‘추방’이라는 의미로, 사물을 일상적인 환경에서 추방하고 이질적인 환경에 배치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물의 원래 의미, 즉 실용적인 성격을 배제하고, 보는 이들의 감각의 심층부에 충격을 준다. 이는 종종 19세기 프랑스 시인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중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이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구절로 표현되곤 한다.
마그리트는 1930년 브뤼셀로 돌아와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3년간은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에도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계속 참여했다. 그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보이게 하는’ 충격을 주었고, 그럼으로써 관람객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 상식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대표작 〈이미지의 반역〉에서 그는 우리의 언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작품에는 파이프가 하나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 글은 언어와 이미지의 실제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먼저 그림은 사물을 아무리 사실적으로 재현하더라도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일 뿐이다. 또한 단어 역시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의 본질을 내포한 것은 아니며, 다만 대상을 지칭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 ‘파이프’와 ‘파이프라는 단어’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또한 미술의 환각법을 이용해 실제와 환영에 대한 상호 관계도 탐구했다. 예컨대 〈인간의 조건〉에서는 화면 오른쪽에 바다 풍경을 그린 캔버스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 화면 속 그림의 소재가 되는 바다 풍경, 즉 창밖의 바다 풍경은 캔버스 속 풍경과 합쳐져 있는 듯 배치되어 있다. 창문을 통해 외부(바다)와 내부(캔버스 속 바다)의 접점,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인식 체계를 다시 숙고하게 만든다. 〈폭포〉, 〈인간의 조건 2〉, 〈해 지는 저녁〉 등에서도 그는 ‘그림 속의 그림’을 제시하여 우리가 믿고 있는 인식 체계의 불완전함과 그 경계의 모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말년에 그린 〈백지 위임장〉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 혹은 두 차원의 경계가 완전히 혼란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말을 타는 여인과 그녀가 지나가는 숲의 나무들 중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경계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 말을 탄 사람은 나무를 가리고 나무는 여자를 가린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 능력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빛의 제국〉과 같이 언뜻 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른 개념들이 한 공간, 하나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도 있다. 〈빛의 제국〉은 일견 밤의 풍경으로 보이지만, 그 위의 하늘은 낮의 하늘이다.
“이 풍경은 우리에게 밤에 대해, 낮의 하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내 생각에 낮과 밤의 동시성은 우리의 허를 찌른다.”
마그리트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현상, 기존의 상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이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세계를 표현한 것과 달리, 일상에서 접하는 친근한 사물을 통해 현실 감각을 뒤트는 실험을 한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사실적인 표현으로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그리트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투시도-다비드의 마담 레카미에〉처럼 사람이 앉을 자리에 관을 놓는 충격적인 작품을 그리기도 했으며, 마네와 르누아르풍의 작품을 제작하는 실험도 했다. 그러나 1940년대 후반 다시 원래의 양식으로 돌아와 더욱 세심하고 기묘한 장면들을 그려 나갔다.
1960년대에는 미국 순회전을 가졌으며, 196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리면서 당대 미국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그리트는 1967년 8월 15일 로테르담의 보이 망스 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리던 가운데, 브뤼셀 자택에서 사망했다.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수많은 현대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주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팝아트라는 새로운 사조를 창출한 젊은 미국 예술가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1960년대 이후 대중문화의 기수들도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다. 제프백, 스틱스, 잭슨 브라운 등의 뮤지션들이 그의 작품을 앨범 재킷으로 사용했으며, 영화 제작자들, 미술가, 광고 제작자들도 많은 영감을 얻었다. 그러면서 그의 작품들은 현대인에게 매우 친숙한 이미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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