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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집을 말한다/송태한 시집/우레를 찾다

o문학 세상

by 송강 작가 2023. 1. 1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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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집을 말한다/ 송태한 시집『우레를 찾다』  
-계간 『시와 표현』 2020 봄호

시집 한 권, 4부에 걸친 80편의 시, 대략 1000일 전후의 낮과 밤, 계속된 시마의 유혹과 불면을 추스르며 진통 끝에 나름의 스토리를 지닌 채 태어난 시편 묶음에 대하여 간략히 피력하는 일이 어찌 손쉬운 행위일 수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의 책갈피 틈으로 난 험한 계곡 길을 따라 무작정 떠나보기로 했다. 산기슭 초입에서 멀찌감치 잠작했던 정상의 풍광이 당연히 내 맘같이 쉬이 그 길을 열어주지는 않을 터, 한 고비 넘기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하여도 초행 산객에게 저만치 가물가물 손에 잡히지 않을 갈레길이 이미 어렵지 않게 예상되는 바이지만.

일찍이 "모든 철학이 죽었다"고 선언했던 20세기 유럽의 천재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의 말처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인터넷과 방송 등 거대 미디어의 홍수에 사고가 함락되어 개개인의 생각 자체가 오롯이 숨 쉬고 살아남기 더욱 어려운 시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동시대인으로부터 아무런 호응이나 교감의 반응이 없을 지라도 어쩌면 문인을 비롯한 예술인들은 "아무튼 나는 말했고, 나의 영혼은 구원받았다"고 말한 마르크스의 풍문과 발자국을 좇는 고독한 순례자일지도 모른다. 독자의 눈앞에 모스 부호처럼 해독하기 쉽지 않은 글을 툭툭 생산하는 시인의 경우는 어쩌면 그 중에서도 더욱 자족적인 작품 활동에 그치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여겨진다.

격랑처럼 밀려오는 정보의 망망대해 속에서 혼잡한 군중 속의 고독을 격하게 앓고 있는 시인들의 작업은 어쩌면 가까운 이웃들보다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불특정 독자를 향해서 어느 날 백사장에 밀려온 자신의 작품을 발견하여 읽어주길 바라며 "병 속의 편지"를 띄워 보내거나 혹은 환경오염과 온갖 공포로 인하여 자정으로 치닫는 지구 종말시간을 눈앞에 두고 구조신호를 시의 형식을 빌려 타전하고 있는 행위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 작품엔 그러한 흔적이 물에 젖은 채로 축축하게 담겨있다.

보도블록/ 아스팔트길 종일토록 밟다/ 불빛 토하며 도열한/ 거리의 상점과 마천루/ 틈새에서 오락가락 두리번거리다/ 가는 곳마다 발길 병목 현상/ 인파와 소음의 접촉사고/ 유리벽에 부딪쳐 깨어진 길바닥 햇살/ 미세먼지 신음 껴안고/ 가로수 그림자 줄지어 기울다/ 일렁이는 비단보/ 일몰마다 펼치고 싸매는/ 노을빛 저으며/ 휘청거리는 길목 손끝에 받아 쥔/ 한 뼘 광고지만 한 하루여// 지하철 노선/ 횡단보도 건너뛰며/ 시내를 왕복하다/ 역과 역, 정류장마다/ 비뚤배뚤 줄선 개미들/ 때마다 스치는 환승 통로/ 환풍구 끝자락에 기대어 숨 돌리는 저물녘/ 호주머니 속 카톡 알림소리/ 출항을 재촉하는 퇴근길은/ 도시의 부둣가인가/ 스마트폰 멀미 추스르며/ 출렁이는 시멘트 갑판 위/ 수신자 불명으로 타전하는/ 잡힐 듯 말 듯 유리병 속/ 하루의 SOS -「서울 SOS」 전문​

어떤 이는 "시집은 시인의 집이며. 한 편 한 편의 시는 그 집의 툇마루요 구들 서까래 기왓장"이라고 말하였지만 나의 경우 시집은 개인의 통역 수첩이라 생각한다. 오래전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하며 자신의 정신 분석 이론을 담은 『꿈의 해석』 저서를 출간했던 바, 나는 시인의 시집이란 사람살이와 사물에 대한 시인의 사적인 통역집이요 해석집이라고 여긴다. 그간 만났던 말 못하는 사물과 동물들 그리고 스쳐가는 세월과 바람의 언어를 혼자 받아 적어 통역하고 번역해 주는 사람이 시인이 아닌가 한다. 「잠의 해석」은 그처럼 ‘해석‘이란 용어를 시의 제목으로 차용한 작품 중 하나이다.



차렵이불 들추니/ 한 평 반 조각구름/ 밀랍처럼 녹아드는 곤한 하루/ 비좁은 눈꺼풀 차양 아래/ 촘촘히 모여든 졸음/ 정박한 어둠 타고/ 속옷 차림으로 출항하는/ 긴박한 여정/ 코앞 휘황한 세상/ 허둥지둥 하루살이/ 저만치 버려두고/ 땅과 하늘 굽이 질러/ 좌충우돌 돈키호테처럼/ 장난감 상자처럼 뒤죽박죽/ 내가 아닌 나와 더불어 떠나는/ 겁 없는 하룻밤 -「잠의 해석」 전문



시집 서두의 '시인의 말'에서 나는 민망한 개인사의 한 시기를 다음과 같이 빙산의 일각처럼 수줍게 내비쳤다



오랫동안/ 헬멧과 두꺼운 우주복을 걸친 채/ 낯선 세상을 둥둥 떠다녔다// 여기 옮긴 시편은/ 잊었던 시간으로의 회귀이다/ 뒤늦은 내성과 자구 속/ 돌아오는 에움길 위 / 배낭 속 얼룩진 꿈이다



지나간 7080 시절 유신 독재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오랜 기간 세상 가장자리로 맴돌고 떠돌기를 계속했다. 인생이 무엇인지 채 알아가기도 전에 달콤한 인생의 단맛조차 맛보기도 전에 그리하여 삶의 작은 목표를 세우는 길목에서 그만 비관의 음습한 세계관에 남몰래 두 발이 빠져들고 말았다. 군사 독재와 이어진 어지러운 시국을 거치며 어느 틈에 자리한 사고방식은 나를 외톨이로 만들고 최루탄의 매운 눈물보다 아린 가슴을 누르며 홀로 외길을 걷는 습관에 물들게 되었다. 졸작「미로에 갇히다」는 우회하거나 돌아가라는 표지판 하나 없이 거미줄만 가득했던 낯선 숲속을 맨몸으로 홀로 싸다녔던 시간의 길지만 짧은 기록이다.



미로는 나의 하루/ 주위엔 키 작은 울타리 밤새 초롱꽃 지키는 창문도 있다/ 길은 몽롱한 표정으로 눈을 뜨고 드문드문 우표딱지 같은 꽃이 핀다/ (중략)....미로는 시작이며 끝, 낯선 길목 앞 오늘도/ 약도 한 장 손에 쥐고 묻는 출구라는 이름의 풍문/ 길은 항시 구름처럼 얼굴을 바꾸고/ 외길 하나 능선에 걸쳐있건만/ 철새 둥지처럼 배낭은 텅 비었다/ 서녘 어스름이 숨을 고르며 땅거미 자박자박 다가오는데/ 이정표 흔들리는 일방통행, 먼지 쌓인 외등이 졸고 있다// 미로엔 시간이 없다/ 모퉁이마다 얼굴 내미는 현재만이 고드름처럼 뚝뚝 녹아내릴 뿐/ 삐걱거리며 문이 열리거나 혹은 닫힐 때마다 내뱉는 안도와 낭패/ 등줄기엔 마른땀이 돋는다/ 가위 눌린 꿈결에 미풍처럼 흘러드는 노래 한 소절/ 노을의 심장, 해가 걸리고/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감겨있는 아득한 바늘구멍 출구/ 미로 끝 한 줌 빛살처럼 -「미로에 갇히다」 부분



구름 모퉁이 뒤에서/ 목 고르는 소리만 들어도/ 당신이 날 부른다는 것/ 이내 예감하죠/ 층층 바람길 허공을 가로질러/ 구름 계단 성큼 밟으며/ 수백 리 외진 땅 언저리에서/ 당신이 날 찾아 헤맬 때/ 남몰래 심장은 쿵쾅거리죠/ 온몸 흠뻑 젖도록 감동 주고/ 머리칼부터 발끝까지 저리도록/ 불현듯 다가와 감전시킬/ 전율 같은 당신의 손끝/ 등줄기에 각인된 어둠 속 사랑/ 아무도 우릴 못 알아봐도/ 꿈꾸듯 목덜미 어루만지며/ 빗줄기가 잠을 깨우면/ 굴뚝 위 곧추앉은 피뢰침처럼/ 까치발 딛고 어둠 속으로/ 불 켜고 다가올 당신을 어느덧/ 내가 되찾고 있죠 -「우레를 찾다」전문



시집의 표제작인 위의 시와 관련된 해설(아름다운 간격, 빛과 어둠으로 버무린 이중적 담론)에서 마경덕 시인은 ‘사랑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에너지이다. 머리칼부터 발끝까지 저리도록 불현듯 다가와 “감전시킬 전율 같은” 사랑이다. 하여 불 켜고 다가올 당신을 찾고 있다. 비록 뜨거운 사랑이 식어갈 지라도 사랑은 “죽을힘”으로 다시 사는 것이다. 이렇듯 상상을 추출하고 재배치하는 실험은 그것 자체로 소중한 몫을 지닌다.’라고 말했다. 「우레를 찾다」는 하루하루 피부를 적시며 흘러가는 미로 같은 시간의 노정에서 노심초사 어렴풋한 길을 헤매며 작가적 영감을 찾아가는 시인의 운명 내지는 각성을 우레 같이 찾아오는 사랑의 감정에 기대어 넌지시 은유하고 그려보고 싶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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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송태한

시집『우레를 찾다(2019)』,『퍼즐 맞추기(2016)』,『2인 시집(1983)』 등
연암문학예술상, 한국문학신문 문학상, 시와표현 기획시선 공모당선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문협 문인저작권옹호위원,  KDA한국도슨트협회 부회장
이치저널, 구민신문에 "시를 그리다" 연재 중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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