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프리드리히

o미술 세상

by 송강 작가 2020. 12. 28. 20:52

본문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작


독일 낭만주의의 기수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는 예술가로서의 자유가 억압된 시대적 상황 때문에 추상적인 관념과 신비주의적 성향을 내보이는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독일에서는 티슈바인(Tischbein, 1751~1829), 프리드리히(Friedrich, 1774~1840), 룽게(Runge, 1777~1810), 달(Dahl, 1788~1857) 등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대체로 자연의 단순 모방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강했다. 독일 관념론의 문제의식과 연관되면서 자연의 풍광을 담더라도 그 안에 정신성을 담아내려 했다. 이성화된 자연을 개성적 방식으로 담는다는 점에서 이후 본격적 낭만주의를 준비하는, 초기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여 주었다.

자연의 위력을 통한 숭고의 체험

칸트에서 셸링을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경험론 미학자인 버크의 숭고 체험을 통한 미적 체험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독일 미술가들도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 화가인 베르네와 루테르부르 등이 추구하던 숭고미를 풍경화에 담아내려 했다. 칸트의 구분에 따르면 “도달 불가능성을 이념적 현시로 생각하도록 규정하는 자연의 대상”을 다루는 역학적 숭고를 추구한다.

〈빙해〉

프리드리히의 〈빙해〉는 당시 독일 화가의 작품 중 숭고의 미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얼음으로 덮인 바다의 날카로운 이미지를 담고 있다. 여기저기 얼음과 뒤섞인 암초가 위협적이다. 그 뒤편으로는 얼음 바다가 끝을 모를 정도로 펼쳐졌다. 오른쪽에는 빙산에 걸려 난파된 배가 마치 장난감처럼 구겨져 있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제한적인 자연의 위력 앞에서 느끼는 숭고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자연의 위력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일 때 사물의 형식을 뛰어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로부터 정신적 자극을 받는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자연의 숭고함을 담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가을 · 겨울 · 새벽 · 안개 · 월광 등의 정경을 자연의 위력과 정적감 속에서 표현함으로써 모방을 뛰어넘는 미적 체험을 주려고 했다.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숭고의 체험을 시도했는데, 끝 모를 공간감을 지니는 풍경은 세계, 절벽은 죽음, 난파선은 좌절을 의미한다. 자연을 통해 내적 긴장감과 반성적 사고를 촉발하기 위한 상징이었다.

빛 · 색채를 통한 인간과 자연의 정신적 교감

광대한 자연의 위력을 통해 숭고함을 체험케 할 뿐 아니라 정막감이 도는 자연 속에 인간을 배치함으로써 좀 더 적극적으로 정신적 충만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프리드리히나 달에게 중요한 것은 사물의 정확한 형태나 동작이 아니었다. 상황과 색채가 인간과 어우러져서 풍기는 공간의 분위기야말로 정신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자연의 단순 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 안에서 함께 공명하는 느낌을 살려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석양을 보는 두 사람〉

프리드리히의 〈석양을 보는 두 사람〉은 자연과의 정신적 공명을 담아내려는 전형적 시도다. 저 멀리 해는 이미 바다 속에 잠기고 구름에 비친 붉은 노을이 어두워지는 하늘을 잔잔히 물들인다. 검은 실루엣으로 남은 두 사람이 정적 속에서 노을을 응시한다. 주위는 이미 상당히 어두워져서 사물의 형체는 분명하지 않다. 노을에 물든 하늘과 이를 세로로 가르는 인물이 시선을 붙잡는다. 그림을 보는 이도 두 사람의 뒤편에서 함께 노을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프리드리히의 작품에서 감상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고 풍경을 향한 인물은 인생의 고뇌에 직면한 인간을 상징한다. 노을빛이 인간과 자연을 동시에 휘감으면서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그들의 얼굴이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노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관찰자의 눈이 아니라 말없이 자연과 자신의 내면이 교감을 나누는 중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보는 이도 이들의 뒤편에서 그 교감에 참여한다.

〈바다의 엄마와 아이〉

달의 〈바다의 엄마와 아이〉도 프리드리히 작품이 주는 감흥을 비슷한 방식으로 제공한다. 해가 구름에 가린 채 점점 바다를 향해 가라앉는 중이다. 하늘과 구름 사이로 어렴풋이 붉은 노을을 드리우고 있다. 아직은 남은 해가 구름을 뚫고 바다의 한 부분을 비춘다. 전면에는 바다를 바라보는 아이와 엄마의 뒷모습이 보이는데, 아이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이나 작은 돛단배의 진로로 봐서는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중인 듯하다.

이 그림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자연의 사물과 인간의 구체적 형태나 동작이 아니다. 캔버스 전체에서 자연과 인간을 아우르면서 녹아 있는 듯한 빛과 색채가 흐름을 지배한다. 해를 가린 구름조차도 잔잔한 색채가 펼치는 향연의 일부분일 뿐이다. 모든 소리와 움직임이 멈춘 듯한 전체 공간의 분위기가 보는 이의 내적인 움직임을 자극한다. 무언가 평화 · 안정 · 균형 등과 같은 정신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두 그림 모두 형태의 사실적 모방을 넘어서는 화가의 개성적 시도를 보여준다. 사물의 외적 형태를 사실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화가의 상상력과 개성을 담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사실성에 가까울수록 같은 자연을 담은 화가들의 그림은 보는 이에게 비슷한 느낌을 전달한다. 하지만 빛과 색채는 같은 대상일지라도 화가에 따라 얼마든지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만큼 정신적 상상력이 결합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진다. 또한 빛과 색채가 중심인 화면 설정은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서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에도 쉽다. 그렇기 때문에 셸링이나 헤겔은 빛과 색채에 주목하면서 회화가 조각보다 우위에 있는 미술 단계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정한 형태와 비율 그리고 획일화된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서 화가의 상상력과 개성을 중시하는 작품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후 본격적 낭만주의 미술을 암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창조적 영감을 통한 상징성의 강화

룽게의 〈아침〉은 풍경화를 통한 자연과 정신의 교감, 빛과 색채를 통한 정신성의 추구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화가의 창조적 영감에 기초하여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화면 설정으로 또 다른 면에서 충만한 정신성을 추구한다. 인생의 네 시기를 아침 · 낮 · 저녁 · 밤으로 표현한 연작 〈네 개의 시간〉 중 첫 그림에 해당하는 〈아침〉이다. 그림은 아래의 한가운데 초원에 누워있는 벌거벗은 아기에서 시작된다. 양 옆으로는 아기 천사들이 꽃을 선사하며 탄생을 축하한다. 화면 배경에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듯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o미술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은정 작가  (0) 2020.12.28
송지연 작가  (0) 2020.12.28
[에듀콘서트] 동시대미술(현대미술)의 진짜 얼굴은? 반이정 미술평론가  (0) 2020.12.27
잭슨 폴락  (0) 2020.12.27
작가 최승윤  (0) 2020.12.27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