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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독립투사

o역사와 삶

by 송강 작가 2020. 12. 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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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8월 29일(7월 11일 음력)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 기념 사진(1940년 5월 16일)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연상(蓮上), 초호는 연하(蓮下), 활동기 이후의 호는 백범(白凡)이다. 아명은 창암(昌巖)이었다가 동학 입도 후에 창수(昌洙), 그 후 구(龜, 九)로 개명하였다. 불교 입교 시기 법명은 원종(圓宗)이었다가, 환속 후 유랑기에는 일시 김두래(金斗來)라는 이름을 썼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1944년 9월 6일, 충칭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공부를 좋아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일급 서당에 가지 못하였다. 9세부터 서당 공부를 시작하여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차린 서당과 이웃 동네 서당에서 항상 일등을 차지하였다. 14세에 평민 출신인 훈장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 한당시(漢唐詩), 대학(大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하여 과거 초시시험 공부를 하였다.

17세인 1892년 해주에서 경과(慶科)의 초시(初試)가 해주에서 열리자, 정훈장의 권고로 과거시험을 보러 해주 관풍각(觀風閣)에 갔으나, 온통 부정투성이인 시험의 실상을 확인하고는 과거시험 공부를 그만두었다.

어려서부터 반상의 차별을 한탄하다가,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입도 수개월 만에 그를 따르는 연비(蓮臂, 신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팔봉(八峯) 접주(接主)에 임명되었는데, 황해도 ・ 평안도 동학당 중에서 가장 어린 접주로 가장 많은 연비를 이끌었다고 하여 ‘아기 접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1894년 19세의 나이로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에 황해도 동학군 선봉장에 임명되었다. 7백 명의 총군(銃軍)을 거느리고 수천 명의 황해도 동학군과 함께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그가 담당한 서문 공격은 계획대로 되었으나, 본대는 남문에서 패전하였다. 그 후 동학군 토벌을 위해 기병한 진사 안태훈(安泰勳)각주1) 과 만나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하고 구월산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이동엽(李東燁) 부대의 습격을 받아 해산한 다음, 신천 청계동에 있는 안태훈의 집에 은신하였다. 안태훈의 집에서는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의 강의와 훈도를 받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1895년 8월(음력)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 및 일본 낭인배들이 궁궐을 야습하여 명성황후(민비) 시해 만행을 자행하자, 그해에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고 일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만주 삼도구(三道溝)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김이언 의병부대는 강계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화력에 눌려 패전하였다.

1896년 2월 안악으로 돌아오다가, 치하포(鴟河浦)의 객주집에서 상인으로 변복하고 밀정 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군 특무장교 중위 쓰치다(土田襄亮)를 발견하고는 국모의 원수 갚는 일의 하나로 그를 처단하였다. 쓰치다 처단으로 투옥되어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옥중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읽고 차츰 개화의식을 갖게 되었다. 1897년 7월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한 달 후 "김창수는 강도가 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므로 특사한다"는 고종황제의 특명이 내렸다. 그러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하게 되자 1898년 3월 탈옥하여 계룡산 갑사를 거쳐 공주 마곡사로 들어가 노승 하은당(荷隱堂)의 제자가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하였다.

 

25세인 1900년 환속하여 강화도로 들어가서 신교육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 무렵 이름을 김구(金龜)로 고쳤다. 1903년에는 황해도 장연읍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였고, 이 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Evert) 청년회 총무로 일했다.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석했다가,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체결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전덕기(全德基) ・ 이준(李儁) ・ 이동녕(李東寧) ・ 최재학(崔在學) ・ 조성환(曺成煥) ・ 김병헌(金炳憲, 후에 별명 王三德) 등과 함께 을사늑약 무효화 상소운동 및 가두연설을 전개하였다.

1906년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총감이 되어 황해도에서 신교육 구국운동 ・ 애국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초 동지들과 함께 안악에 양산학교(陽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7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창립되자 황해도 총감(總監)으로 활동하였다. 신민회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민주공화제’의 민주국가 건설을 공식목표로 설정한 국권회복운동 단체였다. 그는 서명의숙과 양산학교의 교원, 해서 교육총회의 총감, 재령 보강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며, 황해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과 신민회 활동을 총지도하였다.

1910년 3월 신민회는 비밀 전국간부회의에서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만주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한 독립군 기지 건설을 결정하였다. 황해도 총감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군자금과 애국청년 모집 그리고 만주에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벌이던 중, 1911년 1월의 ‘안명근 사건’으로 신민회 황해도 지회 회원 1백 60여명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15년 형을 선고받는데 이어, 1911년 9월 일제가 조작한 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105인 사건, 신민회 사건)’으로 2년 형이 추가되었다.

감옥에서 김구의 ‘구(龜)’자를 ‘구(九)’자로 바꾸고, 호를 평민이라는 뜻으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백범(白凡)이라고 지었다. 1914년 7월에 형기 2년을 남기고 가출옥되어, 주거 제한의 요시찰을 받으면서, 친구 농장에서 농감으로 농민들을 지도계몽 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맞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원 일동(1919년 10월 11일)

3・1운동 후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상하이에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여 이사장을 맡았다. 한국노병회는 국내외에서 지원자를 모집하여 임금을 모아 10년 안에 1만 명의 독립군 예비병과 100만원 군자금을 준비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1923년에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1926년에는 내각수반인 국무령에 선임되었다. 1928년 3월부터 독립운동 전선에서 전사하기로 맹세하고,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로 『백범일지』 집필을 시작하였다.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

 

1929년에는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겸임하였다. 1930년 상하이에서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등과 상하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립하였다.

1931년 7월 일제는 만주에서 ‘만보산사건’을 조작하여 한 ・ 중 양민족을 이간시킨 다음, 1931년 9월 18일 만주침략을 자행하였고, 1932년 1월 28일에는 상하이 침략을 시작하였다. 정규군 30만 명을 투입한 중국측은 1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패전하였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던 임시정부도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임시정부의 승인과 위임하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였다. 1932년 1월 18일 단원 이봉창(李奉昌)을 도쿄(東京)에 파견하여 일왕에게 투탄케 하였다. 폭탄은 명중하지 않았지만, 한인 독립운동가가 일본의 심장에까지 파고들어 일왕을 공격했기에 일제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어서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원 윤봉길(尹奉吉)이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린 천장절(天長節) 겸 상하이점령 전승 경축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들에게 투탄하였다. 상하이 점령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비롯해서 군정 수뇌 일곱 명을 섬멸하였다. 전세계가 한국 독립운동의 완강한 투지에 놀랐다. 중국측은 30만 명의 중국군도 해 내지 못한 일을 한국인 독립운동가 한 사람이 해 냈다고 환호하고 경탄하면서 지원을 본격화하였다. 장제스(蔣介石) 위원장은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안에 한국인장교 양성반의 특설을 허가하여, 한국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독립군 장교훈련이 시작되었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산하에도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가 설립되어 한국인장교 양성이 시작되었다. 후일 전자는 광복군의 기간세력, 후자는 조선의용대의 기간세력이 되었다.

한인애국단 활동이 성공한 후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서 확고한 지도력을 확립하였다. 60세인 1935년 임시정부의 지지정당으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고 이사장이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장수성(江蘇省) 전장(鎭江)에서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을 거쳐 1939년에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한 후, 1940년 4월 1일 한국국민당 ・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을 통합해서 임시정부 여당으로서 새로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일제 말기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의 독립군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였다. 한국광복군이 창건됨으로써 임시정부는 군사력뿐 아니라 외교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하였다. 건국강령은 조소앙(趙素昻)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채용한 것으로써, 정치와 교육의 균등은 자유민주주의에 의거하고, 경제의 균등은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자, 이튿날 임시정부는 즉각 「대일 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12월 9일 공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의 확전에 대응하여,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적극 참가해서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일제 패망과 조국 해방을 내다보고 적극적으로 군사통일을 추진하여, 1942년 4월 국무회의에서는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합병안을 의결하였고, 7월에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시키고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에 임명하였다. 종래의 광복군 제1・2・5지대는 제2지대로 통합 개편하여, 이범석을 지대장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김학규(金學奎)를 제3지대장에 임명하여 한국인 학병 탈출자들을 대상으로 징모활동을 강화하였다.

1942년 10월 개최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는 조선혁명당 출신 좌파 의원들이 참여하여 독립운동세력이 통일을 이루었다. 임시의정원은 한국독립당이 여당이 되고 조선민족혁명당 등이 야당 역할을 한 전 민족적 통일의회가 되었다.

한편, 중국국민당 장제스 위원장을 상대로 한국독립의 국제적 보장을 요구하는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을 초청하여 한국독립의 국제적 보장을 위해 힘쓸 것을 약속하였고, 1943년 12월 1일 장제스가 참석한 연합국수뇌의 카이로선언에서는 ‘한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1944년 4월 헌법을 개정하여 부주석제를 신설하고 국무위원 수를 증원하였는데, 주석에 선출되었다. 부주석은 민족혁명당 대표 김규식이 선출되었다. 한국독립당의 이시영 ・ 조성환 ・ 황학수 ・ 조완구 ・ 차리석 ・ 박찬익 ・ 조소앙 ・ 김붕준 ・ 안훈(조경한) 등 9명, 조선민족혁명당의 장건상 ・ 성주식 ・ 김원봉 등 3명,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및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유림을 국무위원으로 입각시켰다. 이로써 조국의 해방을 앞두고 정부의 통일도 실현되었다.

 

 

이와 함께 광복군과 연합군의 합동작전을 추진하여 광복군을 중국 최전선 전지공작(戰地工作)에 투입하였다. 1943년 6월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과 영국군 동남아사령부 대표 콜린 맥켄지가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광복군 1개 대를 인도 ・ 버마 전선에 파견하여 심리전에 종사케 하였다. 또한 1944년 5월 광복군은 주중국 미공군 사령관 웨드마이어(Wedemeyer, A. C.)의 원조를 얻어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합동으로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을 위한 훈련을 시작하였다. 광복군 제2지대는 지대장 이범석과 OSS의 사전트 소령이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서 합작하였고, 제3지대는 지대장 김학규와 OSS의 윔스가 안훼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서 국내 진입작전을 위한 비밀훈련을 실시하였다. 1945년 8월 시안으로 날아가 광복군의 국내진입훈련을 시찰하던 중 일제가 항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원자폭탄 투하로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기념

충칭, 1945년 11월 3일

 

통일 임시정부를 이끌고 환국할 준비를 하였으나,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획정하여 남북에 주둔했으며, 임시정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개인 자격의 입국만을 허용하였다. 70세인 1945년 11월 23일 부주석 김규식 ・ 이시영 등 국무위원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환국 다음 날인 11월 24일 아침 8시에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키자”는 귀국 방송을 하였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대회에서 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환국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한편, ‘한국독립당’을 기반으로 임시정부의 지도력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즉각 거족적인 반탁(反託)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미 1943년 11월 27일 미국 ・ 영국 ・ 중국 등 연합국 3수뇌의 카이로회담 직후 미국 수뇌부에서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미국에 강력한 항의를 전한 바 있었다. 또 광복 후에 연합국이 한국의 즉각 독립을 방해하여 ‘신탁통치’를 실시하면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다. 당시 반탁운동은 독립운동의 연장이었다.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미・영・중국의 대표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를 결성하고, 2월 14일에는 민주의원(民主議院)을 조직한 후 총리에 취임하였다. 1947년 3월 통일된 대한민국 건국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개설하였다.

1947년 3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國民議會)로 개편되자 부주석에 취임했으며, 11월에는 유엔총회의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48년 3월 유엔 소총회가 ‘가능한 지역에 국한한 선거실시’를 결정하자, 이것이 단독정부 수립에 의해 남북 분단을 고착시키며, 남과 북에 각각의 단독정부 수립은 동족상잔의 내전(內戰)을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하며 반대하였다. 남북협상으로 북쪽을 설득하여, 처음부터 통일대한민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하였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글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밝혔다.

1948년 2월 조국의 분단과 내전을 막고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남북협상을 제의했으며, 1948년 4월 19일 김규식 ・ 조소앙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4김 회담」과 「남북정당사회단체협의회」에 참석하여 남북협상을 마친 뒤,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 김일성의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정계에서 은퇴하여 경교장에서 고전을 읽으며 칩거하였다.

남북 협상 참가를 위해 38선을 넘는 김구 일행(1948년)

1949년 6월 26일, 친일파 잔당들과 일부 권력추구배들이 고용한 안두희(安斗熙)라는 하수인에게 암살당하였다. 일제가 일찍이 방대한 일제 군경조직을 동원하여 60만 엔의 현상금을 걸고 집요하게 추격했지만, 위해를 가하지 못했던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를 해방된 조국 땅 수도 서울에서 친일파 잔당들이 백주에 시해한 것이다. 유해는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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