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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o역사와 삶

by 송강 작가 2019. 1. 17.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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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異次頓)


 

 

 

 

〈삼국유사〉에 인용된 일념(一念)의 〈촉향분례불결사문 髑香墳禮佛結社文〉에 의하면 성은 박씨이며 아버지는 알 수 없고, 할아버지는 아진종랑(阿珍宗郞)으로 습보 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다.

그러나 같은 책에 인용된 김용행(金用行)이 찬한 아도비문(阿道碑文)에는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부가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했다. 그의 이름은 거차돈(居次頓)·염촉(厭觸 : 또는 猒觸)·이처(伊處)·처도(處道)라고도 한다. 순교 당시 국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사사인(內史舍人)의 직책에 있었다.

빛나고 착실한 사람으로서 심지가 곧고 심중(深重)하며 의로움에 분발하는 용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는데 귀족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차돈이 왕과 함께 그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강구했다. 이차돈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불교를 융성시키고자 했으나 왕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비록 제가 죽더라도 도를 펴게 된다면 유감이 없겠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그는 왕과 비밀리에 약속한 뒤 왕명을 가장하여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지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신하들의 논란이 분분했다. 왕이 신하에게 물으니 모두 "지금 승려를 보니 깎은 머리에 옷차림이 누추하고, 하는 이야기가 괴이하니 이를 좇으면 후회가 있을 것이므로 죽을 죄를 짓더라도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차돈은 "비상한 사람이 있은 뒤에 비상한 일이 있다. 내가 들으니 불교의 이치는 오묘하여 불가불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왕은 "너 혼자만 다른 이야기를 하니 양쪽을 좇을 수가 없다"고 하여 죽이려 했다. 이차돈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내가 불법을 위해 형장에 나가지만 의리(義利)를 일으키려 한다. 부처가 만일 신통력이 있다면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목을 자르자 머리가 하늘을 날아 금강산(金剛山 : 경주 북쪽)에 떨어지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장(丈)이나 솟아났으며, 순간 주위가 어두워지고 하늘에서는 기묘한 꽃들이 내려오며 땅이 크게 진동했다. 그러자 귀족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유해를 금강산에 장사지냈다. 또 이후로는 불법을 받들고 귀의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이로써 신라에 불교가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향전 鄕傳〉에 의하면 이차돈은 왕과 비밀리에 약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절을 짓도록 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순교 당시 이차돈의 나이는 22세 또는 26세로 전한다.

그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은 529년(법흥왕 16)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고, 신라 최초의 불교사찰인 흥륜사(興輪寺)를 천경림에 짓기 시작해 544년(진흥왕 5)에 완성했다. 절을 지을 때 사용된 재목을 모두 천경림에서 구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재래신앙이 행해지던 장소였다고 짐작된다.

그런데 흔히 이차돈의 순교와 동시에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간주하지만, 그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즉 〈삼국유사〉에서는 흥륜사를 짓는 것이 527년 에 비로소 시작하여 534년에 천경림을 베어내어 공사를 일으켰다고 했고, 〈고승전〉에서도 534년에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내고 절을 지었는데 이것이 신라 창사(創寺)의 시작이라고 한 것이 그 근거가 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전승이 전하는 것은 신라에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이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차돈의 순교 이전에도 이미 묵호자(墨胡子)나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에 와서 불교를 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사실이 전한다. 이는 신라 귀족들의 폐쇄성이라든지 재래신앙의 강고함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불교의 공인은 기본적으로 신라의 정치체제에서 왕권의 강화과정과 함께 이해되고 있다. 즉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분화되고 보다 복잡해진 사회를 일원적으로 포괄하는, 한 차원 높은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지배이념이 필요했고, 불교는 그에 적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다원적인 귀족세력을 강력한 왕권 아래에 두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다. 상대등(上大等)이 설치되어 귀족세력과 왕권의 완충역할을 맡게 되는 것도 불교가 공인된 직후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후 불교는 왕실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되었고, 법흥왕과 왕비는 만년에 승려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설화는 불교가 융성한 뒤에 꾸며진 신비한 내용이지만, 불교 수용을 전후한 시기의 왕실과 귀족세력 간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이차돈이 순교한 뒤 왕실의 내인(內人)들이 명복을 빌기 위해 자추사(刺楸寺)를 지었는데, 집집마다 이 절에서 치성을 드리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고 여러 사람이 도를 행하여 불교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817년(헌덕왕 10)에 그의 순교장면과 함께 사적을 새긴 6각석당(六角石幢)이 경주 백률사(柏栗寺)에 세워졌다.

이 석당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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