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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

o미술 세상

by 송강 작가 2021. 1. 1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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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20세기 오스트리아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인체의 왜곡, 독특한 구도와 색채가 특징인 심리적이고 에로틱한 주제의 초상화와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수직적 시점과 뚜렷한 윤곽선, 강렬한 색감이 돋보이는 표현주의적 풍경화 역시 유명하다. 그의 작품들은 예술적으로 새로울 게 없다고 느껴지던 초상화와 자화상, 풍경화 장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1890년 오스트리아 동북부 툴른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툴른시 역장으로 일했는데, 실레의 스케치북을 불태워 버릴 정도로 아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싫어했다. 학창 시절 실레는 부끄럼 많고 내성적이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으로부터 미술 공부를 계속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여동생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에는 누드화도 있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한 이후 삼촌의 도움으로 1906년 비엔나의 예술공예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전통적인 학풍을 띤 비엔나 미술학교로 진학했다.

1907년 그가 평소 존경했던 구스타프 클림트를 처음 만났다. 유럽 미술계의 변방이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유럽 미술의 흐름을 체감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실레는 클림트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았다. 실레보다 스물여덟 살이 많았던 클림트는 예술적으로 실레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는데 그림 구매, 모델 섭외, 후원자 연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실레를 후원해 주었다. 두 사람은 평생 가깝게 지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1908년 동료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듬해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에 반발하여 3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뜻을 같이 하는 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예술 그룹’을 만들어 전시 활동을 이어 나갔다. 실레는 인체의 왜곡과 들쭉날쭉한 윤곽선이 돋보이는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1911년 한때 클림트의 모델이었고, 자신의 그림 모델이었던 발레리 뉘질과 동거를 시작했다. 둘은 실레 어머니의 고향인 크루마우(현재 체코의 남부 지역)에 정착했으나, 소녀들을 모델로 쓰는 것에 분노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쫓겨났다. 이후 빈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노일렌바흐로 이사하여 작업실을 열었으나, 미성년자를 유혹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작품은 포르노로 취급되어 압수되었다. 재판에서 미성년자 유혹 및 학대 혐의는 기각되었으나 공공장소에서 에로틱한 그림을 전시한 것에 대해서는 유죄 판결을 받고 24일간 수감되었다.

1914년 빈으로 돌아와 중산층 집안의 딸인 에디스 함스와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동거 중이던 발레리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발레리는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떠났고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죽음의 여인〉은 발레리가 떠난 슬픔과 분노를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는데 실레는 결혼 후 나흘 뒤에 징집되어 체코 프라하에 주둔한 군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본 상관 덕분에 창고를 작업실로 쓰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복무 중에도 왕성한 전시 활동을 한 그는 취리히, 프라하, 드레스덴 등지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917년 빈으로 돌아와 클림트와 함께 전시 공간이 부족했던 오스트리아 화가들을 위한 미술관을 설립했다. 1918년 2월 그의 예술적 아버지였던 클림트가 사망했다. 3월에는 빈 분리파의 연례 전시회에서 실레의 특별 전시가 열렸는데 이 전시회는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임신 6개월이던 아내가 유럽에서만 2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었고, 그로부터 3일 후 실레 역시 짧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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