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개봉한 영화 ‘인터스텔라’는 웜홀과 블랙홀을 실감나게 묘사해 화제가 됐다. 저명한 천체물리학자인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칼텍) 킵 손 교수가 만든 수식을 더블네거티브라는 영국 회사에서 컴퓨터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해낸 결과다. 이렇게 탄생한 영상은 영화에서 불멸의 장면이 됐을 뿐 아니라 ‘고전중력과 양자중력’이라는 학술지에 발표되기도 했다.
학술지 ‘네이처’ 2015년 2월 26일자에는 블랙홀에 대한 또 다른 놀라운 연구결과가 실렸다. 지구보다 33만 배 무거운 태양보다 무려 120억 배나 무거운 블랙홀이 관측됐다는 내용이다.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질량이다. 이런 천체를 거대질량 블랙홀(supermassive black hole)이라고 부른다.
1930년대 간접 증거 관측
거대질량 블랙홀은 말 그대로 질량이 어마어마하게 큰 블랙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 블랙홀, 즉 태양보다 수십 배 무거운 별이 초신성폭발을 하고 남은 천체도 태양보다 수 배 더 무겁다. 이들은 별과 비교할 만 하다고 해서 ‘별 질량 블랙홀(stella mass black hole)’이라고 불린다. 태양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별 질량 블랙홀도 거대질량의 천체인 셈이다. 그런데 거대질량 블랙홀은 별 질량 블랙홀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구다. 태양질량의 100만 배에서 120억 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별 질량 블랙홀의 개념은 1915년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이듬해 독일의 천문학자인 카를 슈바르츠실트가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논문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는 일반상대성 이론을 이용해 별의 외부와 내부의 시공간 곡률을 계산했는데 이상한 결론이 나왔다. 즉 태양질량의 별이 수축해 반지름이 3km에 이르는 순간 중력이 어느 선을 넘어서면서 표면에서 시간은 무한대로 길어지고 빛은 탈출할 수 없다는 것. 이 지점을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이라고 부른다.
블랙홀 개념의 토대를 마련해준 아인슈타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블랙홀(아직 이 이름은 없었다)이 터무니없는 얘기라며 끝까지 거부했다. 한편 1930년대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중성자별을 연구하다가 블랙홀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뒤에도 블랙홀 존재를 믿는 사람은 소수였고 1960년대 접어들어서야 많은 사람들이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블랙홀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게 1967년이다. 1970년 들어 마침내 지구에서 6000광년 떨어진 곳에서 강한 X선을 내는 천체인 ‘시그너스 X-1’의 중심에 블랙홀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거대질량 블랙홀 주변 상상도
이처럼 별 질량 블랙홀은 이론으로 가능성이 알려지고 50년이 더 지난 뒤에야 그 존재가 관측됐지만 거대질량 블랙홀은 거꾸로 그 존재(간접 증거)가 1930년대 처음 관측됐다(간접 증거). 그러나 천문학자들은 1960년대 퀘이사가 관측될 때까지 거대질량 블랙홀의 존재 가능성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위에서 말한 1930년대 관측이란 우주전파를 말한다. 당시 미국 벨전화연구소는 전화 통화를 간섭하는 소음(전파)의 실체를 밝히는 연구를 신입사원인 칼 잰스키에게 맡겼다. 1932년 그는 전파안테나를 만들어 그 잡음이 주로 우리은하의 중심에서 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주에서 오는 전파의 실체가 궁금해진 잰스키는 좀 더 정밀한 관측을 위해 전파망원경을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당연히 거절당했고 그도 통신 연구로 돌아갔다.
그런데 미국 일리노이주 휘턴에 살고 있던 아마추어 무선사 그로테 레버가 과학잡지에서 잰스키의 우주전파에 대해 읽고 흥미를 느꼈다. 그는 홀로 집 뒤뜰에 지름 9m인 접시형 전파망원경을 만든 뒤 하늘을 훑어 1939년 전파지도를 만들었다. 전파의 세기를 등고선으로 나타낸 그의 지도를 보면 우리은하의 중심과 백조자리,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강력한 전파가 나옴을 알 수 있다.
훗날 카시오페이아자리의 전파원은 초신성의 잔해로 밝혀졌지만 백조자리의 전파원(백조자리 A)은 은하이고 그 중심에는 태양질량의 약 25억 배인 거대질량 블랙홀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구에서 6억 광년 떨어져 있는 백조자리 A에는 서로 30만 광년 떨어진 두 전파원이 있는데 거대질량 블랙홀이 분출하는 제트의 양쪽 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주에서 온 강력한 전파의 근원이 블랙홀의 제트였던 것이다.
중간질량 블랙홀 연구도 활발
태양크기 10배 블랙홀을 은하수를 배경으로 600km 거리에서 바라본 시물레이션 영상
2000년대 들어 중심에 거대질량 블랙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은하가 계속 발견됨에 따라 이제 거대질량 블랙홀은 타원은하와 팽대부가 있는 원반은하가 중심에 갖고 있는 천체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거대질량 블랙홀은 얼마까지 거대해질 수 있을까.
2011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발표된 논문에서 미국 UC버클리 니콜라스 맥코넬 박사팀은 지구에서 3억 2000만 광년 떨어진 은하 NGC3842의 중심에 태양질량의 약 100억 배 블랙홀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연구자들은 “초기 우주의 퀘이사 밝기를 생각하면 일부 블랙홀의 질량은 태양의 100억 배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관측위성의 감도가 높아지면 더 무거운 블랙홀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중국 베이징대 연구자들이 빅뱅 이후 10억 년이 채 되기 전인 초기 우주의 퀘이사에서 온 빛을 분석한 결과 중심에 태양질량의 120억 배에 이르는 블랙홀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별 질량 블랙홀의 질량이 태양의 수~수십 배이고 거대질량 블랙홀은 태양의 100만 배 이상이라면 중간 크기의 블랙홀은 없을까. 2003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데이비드 시 박사팀은 NGC4395라는 팽대부가 없는 나선은하를 관측해 중심에 있는 블랙홀의 질량이 태양의 1만~10만 배라고 추측했다. 그 뒤 다른 연구진이 좀 더 정밀하게 측정한 결과 블랙홀의 질량은 태양의 36만 배로 올라갔다. 지금까지 태양 질량의 수십 만 배 크기의 블랙홀이 수십 개 발견됐고 ‘중간질량 블랙홀(intermediate-mass black hole)’로 불리고 있다.
지난 2007년 영국 사우샘프턴대 토머스 매카론 박사팀은 지구에서 5000만 광년 떨어진 거대 타원은하 NGC4472에 있는 구상성단의 중심에 질량이 태양보다 400배는 무거운 중간질량 블랙홀이 있다고 ‘네이처’에 발표했다. 구상성단은 수십 광년의 공간에 수천~수백만 개의 별이 몰려 있는 천체로 이 안에 블랙홀이 있을 수 있는가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그렇다면 중간질량 블랙홀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변해갈까. 별 질량 블랙홀이 자라서 중간질량 블랙홀이 됐을까. 아니면 중간질량 블랙홀이 자라서 거대질량 블랙홀이 됐을까. 미국 프린스턴대 제니 그린 교수는 “현재는 중간질량 블랙홀에 대해 많은 중요한 질문이 던져진 상태”라며 “이에 대한 답이 나오면 은하와 블랙홀이 처음에 어떻게 형성됐는가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우주에 질량이 태양의 수배에서 수십 억 배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블랙홀 미스터리는 오히려 깊어지고 있다. 앞으로 한 동안은 많은 뛰어난 과학자들이 블랙홀의 매혹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