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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후크니/송강 온라인갤러리

o미술 세상

by 송강 작가 2020. 12. 29.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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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후크니/송강 온라인갤러리

데이비드 호크니

영국의 미술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OM, CH, 1937년 7월 9일 ~ )
영국의 화가, 소묘가, 판화가, 무대 디자이너, 사진가이다.
1960년대 팝 아트 운동에 기여한 20세기 영국 미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출생1937년 7월 9일 (83세)
브래드퍼드직업화가, 판화가, 사진가, 무대 디자이너, 데생화가, 삽화가, 석판화가국적 영국학력영국 왕립예술대학
첼시 예술대학교
Bradford Grammar School스승Frank Lisle분야회화, 판화, 사진, 무대 디자인사조극사실주의, 현대 미술, 팝 아트, Nouveau réalisme수상다카마쓰노미야 전하기념 세계문화상 (1989)
캘리포니아 명예의 전당 (2015)

주요 작품

더 큰 첨벙, 예술가의 초상

영향

파블로 피카소, 프랜시스 베이컨웹사이트www.hockney.com

호크니는 영국 이스트라이딩오브요크셔주 브리들링톤(Bridlington)과 런던에 자택과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두 개의 거주지를 가지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1964년부터 거주하였으며, 한 곳은 할리우드 힐스에, 또 다른 한 곳은 말리부에 위치하고 있다. 샌타모니카와[3] 웨스트할리우드에는 각각 사무실과 아카이브가 있다.[4][5][6]

2018년 11월 15일에 호크니의 1972년 작 ⟪예술가의 초상⟫(Portrait of an Artist - Pool with Two Figures)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9천만 달러에 낙찰되었고, 그로써 제프 쿤스의 ⟪풍선 개⟫(Balloon Dog - Orange)가 세운 5천 8백 4십만 달러의 기록을 경신하며[7] 지금껏 경매에서 팔린 가장 비싼 생존 작가의 작품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8][9][10] 이 기록은 2019년 5월 15일에 제프 쿤스의 ⟪토끼⟫(Rabbit)가 9천 백만 달러에 판매되면서 다시 갱신되었다.[11]

생애편집

데이비드 호크니는 영국 잉글랜드 북부 웨스트요크셔주에 위치한 브래드퍼드(Bradford)에서 로라와 케네스 호크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12][13] 웰링턴 초등학교, 브래드퍼드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브래드퍼드 미술대학을 거쳐 런던에 소재한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에서 수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평생의 친구가 될 R. B. 키타이(R. B. Kitaj)과 조우한다.[12] 데이비드 호크니는 런던에서의 생활이 집처럼 편안했다고 회고하고 당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긍심을 느꼈다고도 말했다.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 재학 당시, 신예를 발굴하고 대중에 소개하는 단체인 '영 컨템퍼레리스'(Young Contemporaries)를 통해 그의 전시회가 열리면서 영국 팝 아트의 시작을 알렸다. 호크니가 팝 아트의 흐름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초창기 작품에는 인상주의 요소가 더 많이 드러났고, 영국의 표현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과도 유사한 면이 많다. 1962년 학교에서 라이프 드로잉 과제를 완성하지 않으면 졸업장을 줄 수 없다고 하자, 호크니는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졸업장을 위한 라이프 페인팅(Life Painting for a Diploma)"을 그려 제출했다. 기말고사에 필요한 에세이 작성도 거절하면서 자신은 오로지 작품으로만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는 호크니의 재능과 점점 더 높아가는 명성을 인식하며 학교의 규정을 바꾸었고 그에게 졸업장을 수여했다. 졸업 후 호크니는 메이드스톤 미술대학에서 잠시 교수했다.[14]

1964년 로스엔젤레스로 건너간 호크니는 그곳의 이국적 분위기에 영감을 받아 강렬한 색감으로 표현된 아크릴화 작품 수영장 시리즈를 그린다. 로스엔젤레스와 런던 그리고 파리를 오가며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보낸 호크니는 1974년부터 연인으로 발전한 그레고리 에반스와 1976년 미국으로 함께 건너온다. 그레고리와는 2018년 현재까지 사업 파트너로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15] 1978년 호크니는 할리우드 힐스에 집을 임차한 뒤 후일 구매해서 확장 후 작업실을 추가했고,[16] 말리부에 위치한 1,643 평방피트의 해안 별장을 소유하였다가 1999년 약 150만 달러에 매각했다.[17]

작품 세계편집

호크니는 페인팅, 드로잉, 판화, 수채화, 사진 뿐 아니라 팩시밀리나 종이 펄프, 컴퓨터와 아이패드의 드로잉 프로그램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며 작품을 했다.[18] 정물, 풍경, 친구들의 초상화나 애완견 등을 주로 많이 그렸지만, 뉴욕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나 영국 루이스의 글라인드본(Glyndebourne) 오페라 극장, 런던의 로열 코트 극장(Royal Court Theatre) 등 무대 디자인에도 관심을 보였다.

초상화편집

우리 달라붙은 두 소년(We Two Boys Together Clinging)

어떤 새로운 작업을 하든 호크니는 결국 늘 초상화 작업으로 돌아왔다. 1968년부터 이후 몇년 동안 호크니는 친구, 연인, 친척들을 모델로 해서 인물의 특징을 사실주의적 잘 잡아 그린 등신대 초상화와 2인 초상화를 그렸다.[19] 호크니는 동일한 인물들을 반복해 그렸는데, 그의 가족과 고용인들도 그렸지만 친구이자 조수였던 모 맥터모트(Mo McDermott)와 모리스 패인(Maurice Payne)을 자주 그렸고, 그의 유명한 그림 《클라크 부부와 퍼시》(Mr and Mrs Clark and Percy)(1970~1971)에 등장하는 패션 디자이너 셀리아 버트웰(Celia Birtwell, 1941~)과 오시 클락(Ossie Clark, 1942~1996)도 자주 그렸다. 큐레이터 헨리 겔트잘러(Henry Geldzahler, 1935~1994)나 아트 딜러 니콜라스 와일더(Nicholas Wilder)와[20] 조지 로슨(George Lawson)의 그림도 많다. 그의 연인이자 발레리노였던 웨인 슬립(Wayne Sleep, 1948~)도 호크니의 초상화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다. 그 기간 중 호크니의 로맨틱한 관심의 대상이었던 미국의 화가 피터 슬레진저(Peter Schlesinger)와 큐레이터이자 오랜 친구였던 그레고리 에반스(Gregory Evans)도 호크니의 초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람들이다.[19] 하지만 이들 초상화보다 자신을 더 많이 그린 호크니는 자화상만 300점이 넘는다.[21]

1999년부터 2001년까지 호크니는 미술사를 연구하면서 과거 예술가들이 그리기 도구로 사용했던 광학 장치 카메라 루시다에 관심을 가졌다. 자기 작품을 제작하는 데도 그 장치를 사용해서[22][23] 200여점이 넘는 드로잉을 남겼다.

2016년 영국왑립예술원은 호크니의 《82점의 초상화와 1개의 정물》이라는 작품 시리즈를 전시했다. 그 작품들은 2013년부터 호크니가 그린 새 초상화 시리즈로, 모델들이 호크니를 위해 매일 6-7시간씩 앉아 3일 연속 포즈를 취했기 때문에 호크니가 "24시간 노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4] 왕립예술원의 그 전시는 2017년 베네치아의 카 페사로 미술관(Ca' Pesaro)에서 다시 전시되었고,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도 순회되었다. 이듬해인 2018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으로 이동해 전시되었다.

판화편집

호크니는 1954년에 일찍이 석판화를 시도하며 자화상을 남겼다.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1959~1962년)에 다니던 시절에는 동판 작업도 했다.[25] 1965년 로스앤젤레스 소재 예술 작업장이자 판화 및 조각 작품의 한정판을 다루는 출판사인 '제미니 G.E.L'(Gemini G.E.L.)에서 호크니에게 LA를 주제로 한 석판화 시리즈를 제작해보는 게 어떻겠는지 물었다. 호크니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어느 헐리우드 스타의 소장 미술품을 한 점 한 점 상상으로 재현해 《헐리우드 콜렉션》이라 이름 붙인 석판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호크니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친구들, 날씨 시리즈(Friends, The Weather Series)》와 《판화 신작들(Some New Prints)》을 포함한 많은 작품집을 제미니 G.E.L과 함께 제작했다.[26]

1960년대에 호크니는 '시각적 이야기'로 여겨지는 일련의 판화 작품 시리즈를 생산했다. 윌리엄 호가스의 작품을 따라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제작한 《난봉꾼의 행각(A Rake’s Progress)》 시리즈와[27] 1966년에 제작한 《콘스탄틴 피터 카바피의 24개 시를 위한 삽화(Illustrations for Fourteen Poems from C.P. Cavafy)》가 그에 포함된다.[28] 1969년에 제작한 39장의 에칭 연작 《그림 형제의 여섯 편의 동화를 위한 삽화(Illustrations for Six Fairy Tales from the Brothers Grimm)》도 있다.[29][25]

1973년에 호크니는 피카소가 좋아했던 판화가이면서 유럽과 미국의 여러 유명 예술가들과 협업해 우화 인쇄물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한 벨기에의 알도 크롬랑크(Aldo Crommelynck, 1931~2008)와 협업을 시작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작업장에서 호크니는 크롬랑크의 트레이드마크인 "슈가 리프트"(sugar lift)라고 불린, 붓으로 하는 동판화 기법을 채택해 작업했다. 크롬랑크가 색상 분리를 확보하기 위해 동판에 목재 틀을 얹은 방법 역시 그대로 채택했다. 둘의 초기 작업으로는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제작된 《화가와 모델》(Artist and Model), 1974년에 제작된 《프랑스식 역광》(Contrejour in the French Style)이 있다.[25] 1976년에 호크니는 크롬랑크의 작업장에서 《푸른 기타: 파블로 피카소로부터 영감을 받은 월리스 스티븐스가 영감을 주어 데이비드 호크니가 제작한 동판화 작품들(The Blue Guitar: Etchings By David Hockney Who Was Inspired By Wallace Stevens Who Was Inspired By Pablo Picasso)》이라는 제목의 20점의 동판화 시리즈를 만들었다.[30] 그 동판화 작품들은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가 쓴 《푸른 기타를 든 남자》(The Man with the Blue Guitar)라는 시상과 관련이 있다. 그 시는 피터스버그 출판사(Petersburg Press)에서 1977년 10월에 시와 이미지들이 함께 들어간 형태의 간행본으로 발간되었다.[31]

호크니의 다른 판화 작품집으로는 1986년에 제작된 《직접 만든 판화(Home Made Prints)》와[32] 1998년에 제작된 《최신 동판화(Recent Etchings)》, 1984년부터 1986년에 걸쳐 제작된 《움직이는 초점(Moving Focus)》 등이 있다.[33] 《움직이는 초점》에는 호크니가 멕시코시티로 가는 도중 차가 고장 나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는 아카트란(Acatlán)의 한 호텔을 그린 페인팅 《아카트란의 코트야드 호텔 주변 산책(A Walk Around the Hotel Courtyard, Acatlán)》과 관련 있는 석판화 작품들이 담겨 있다. 호크니의 판화 작품들은 팩스기와 잉크젯 프린터기로 뽑은 그의 '컴퓨터 드로잉'들과 같이 런던의 덜위치 미술관(Dulwich Picture Gallery)에서 2014년에 열린 회고전에 전시된 바 있다.[25]

사진 콜라주편집

1980년대 초, 호크니는 자신의 개인적인 사진 앨범을 뒤져 작업 방식을 터득해 간, 후에 그가 "조이너스(joiners)"라고 부른 사진 콜라주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34] 처음에는 폴라로이드로 인화했고, 그 다음에는 35mm 필름을 상업적으로 처리해서 칼라로 인화했다. 폴라로이드 사진이나 현상소에서 인화한 사진들을 이용해서, 호크니는 이미지 조각들을 잘 배열해서 하나의 구성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35]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서로 다른 관점에서 촬영된 사진들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 결과는 입체파 작품들과 유사한 데가 있었다. 그 자체가 호크니가 목표한 바이기도 하다. 호크니는 인간의 시각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페어블로솜 2번 고속도로(Pearblossom Highway #2)" 같은 풍경 작품도 있고,[1][36] 《데이미브 카스민(David Kasmin)》(1982)이나 《우리 엄마 볼턴 애비(My Mother, Bolton Abbey)》(1982) 같은 초상 작품도 있다.[37][38]

"조이너스"는 어쩌다 우연히 만들어졌다. 당시 60대 말이었던 호크니는 사진작가들이 광각 렌즈를 사용해 찍는 사진들은 왜곡이 심해서 별로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LA의 집 거실과 테라스를 그리던 중, 폴라로이도로 거실 사진을 몇 장 찍어 그것들을 풀로 붙였다. 그 자체로 뭔가를 구성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사진들을 보니, 관객이 방을 통해 움직이기라도 하는 양 합쳐진 그것들이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호크니는 이 발견 이후 사진들로 더 많이 작업했고, 이 새로운 기법에 흠뻑 빠져 한동안 그림 그리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사진은 렌즈라는 하나의 눈으로만 대상에 접근하는 한계를 갖고 있어 호크니는 결국 그것을 포기하고[39] 다시 페인팅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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